[베이징 현장에서] “서희도 손발이 있어야 담판을 하죠"

베이징=오광진 특파원
입력 2019.04.15 15:02
"젊은 인재들이 통 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서희도 손발이 없으면 담판을 할 수 있겠습니까. " 작년말 베이징에 있는 주중한국대사관 관계자가 사석에서 고려시대 탁월한 외교가 서희를 거론하면서까지 한 얘기가 떠오른 건 대사관 등급이 미국(워싱턴), 일본(도쿄), 영국(런던) 등 주요 선진국 공관에 부과되던 ‘가급’에서 ‘나급’으로 내렸다는 소식 때문이다. 나급 지역은 일부 유럽 지역과 동남아시아 국가다.

베이징 대사관의 등급 강등은 젊은 외교관의 중국 기피 현상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등급이 내려갈수록 험지로 분류된다. 등급이 높은 곳과 낮은 곳을 번갈아 근무시키는 외교부의 공정 인사 원칙을 감안하면 베이징 대사관에서 일하면 다음 근무지가 험지가 될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이다.

외교부는 "공관의 정무적 중요성과 등급은 무관하다"는 입장이라지만 젊은 외교관들의 기피는 외교부가 신설을 추진중인 중국국(局)이나 베이징대사관이 중요성에 걸맞는 수준을 갖추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를 낳는다.

사드보복이 한창이던 2017년 10월 베이징에 있는 주중한국대사관이 주최한 국경절 행사에 중국측은 예년과 달리 차관보급 인사를 보냈다. 2016년에는 중국측 주빈인사가 참석하지 않았고, 2018년에야 중국 외교부는 차관급 인사를 보냈다. /베이징=오광진 특파원
젊은 외교관들의 중국 기피는 미세먼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자가 특파원 부임을 하던 2016년 ‘에어포칼립스(airpocalypse)’란 신조어까지 등장하던 것에 비하면 공기 질이 개선돼 그 탓만으로 돌리기는 무리다. 에어포칼립스는 공기(air)와 대재앙을 뜻하는 아포칼립스(apocalypse)의 합성어로 대기오염으로 인한 대재앙을 의미한다.

중국의 국가 위상이 올라가며 공격적 외교 행보와 함께 한국 등 주변국을 대하는 시선이 싸늘해진 탓도 있다.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의 한반도 배치로 중국의 경제보복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부각된 ‘조용한 한국 외교’의 한계도 한 몫했다.

지난 2017년 단체관광 금지, 한류 콘텐츠 금지, 롯데마트 매장 영업정지 등 사드 보복 조치가 나올 때마다 베이징의 한국 외교관들에게 대응을 물으면 "중국은 원래 그래요"라는 답이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드 보복에 이어 미·중 무역전쟁은 ‘조용한 외교’에서 ‘당당한 외교’로의 전환을 가늠해보는 계기를 제공한다. 유럽과 일본은 최근 중국과의 협상에서 예전 보다 더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미국의 공격을 받는 중국이 지지세력 확보를 위해 ‘양보’의 용인도를 높였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을 유럽·일본의 국제 위상과 비교할 수 있느냐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한국이 중국에 갖는 위상은 작지 않다. 사드 갈등 전인 2016년만해도 중국에 가장 많이 투자(외국인 직접투자⋅FDI 기준)한 국가는 중개지 성격이 강한 홍콩과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한국이 1위였다. 2017년과 2018년엔 홍콩, 싱가포르, 대만 다음으로 4위였다. 올들어 1~2월은 홍콩 다음으로 중국에 가장 많은 돈을 투자했다. 중국에 상품을 가장 많이 파는 나라(수입 대상국 1위)도 한국이다. 중국이 사주는 ‘시혜’를 베푸는 게 아니다. 반도체 등 필요한 물품을 구매한 결과일 뿐이다.

사드보복 이전인 2016년까지만해도 중국을 찾는 외국인수 1위 역시 한국인이었다. 전체 외국인 관광객의 16.9%를 차지했다. 중국에 가장 많은 유학생을 보내는 나라도 한국이다. ‘당당한 외교’에 나설 이유는 많다.

장하성 신임 주중대사가 지난 8일 베이징에서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13번째 대사로 취임했다. /베이징=오광진 특파원
장하성 신임 주중 대사는 지난 8일 베이징 주중한국대사관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4가지 부문에 주안점을 두면서 양국 정상을 포함 활발한 고위급간 교류 대화를 추진하겠다고 했다. 대사가 평소 어느 정도 급의 인사를 만나는지가 다른 대사관 직원들이 만나는 중국측 인사들의 격을 좌우한다.

장 대사가 종이에 적힌 취임사를 읽어내려가기 전 내뱉은 한마디는 "얼마나 할지 모르겠지만"이었다. 마이크가 있었지만 소리가 적어 뒤에서는 들릴 듯 말 듯했다. 격변하는 동북아 외교 현장에서 장 대사가 국익을 챙기는 ‘당당한 외교’에 나서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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