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도 김정은도 "내편에 서라"… 위기의 文대통령 중재자론

정우상 기자
입력 2019.04.15 03:00

美 '빅딜' 원칙 고수, 北 '우리 민족끼리' 노골화에 입지 좁아져
靑, 김정은 연설에 적잖은 충격… 文, 오늘 원론적 입장 밝힐 듯

그동안 '한·미 간 중재자·촉진자'를 자임해 온 문재인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 '노딜'에 이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오지랖 넓은 중재자 행세하지 말라"는 직설적 발언으로 입장이 난처해졌다. 문 대통령은 당초 한·미 정상회담과 남북 정상회담으로 3차 미·북 회담의 동력을 마련하겠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동맹의 편에 서라"는 미국과 '우리 민족끼리'를 요구하는 북한 사이에 끼어 입지가 더 좁아졌다. 문 대통령은 15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시정 연설과 한·미 정상회담, 4차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입장을 표명할 계획이지만, 미·북 모두에 중재자 역할을 거부당하면서 선택의 기로에 섰다.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1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왼쪽 사진).이미지 크게보기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1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9월 19일 평양 백화원 초대소(영빈관)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뒤 '평양 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악수하는 장면. /EPA연합뉴스·평양사진공동취재단
청와대는 14일 김정은의 시정 연설에 침묵했다. 김정은은 3차 미·북 정상회담에 대해 미국의 태도 변화를 전제로 "한 번 더 해볼 용의가 있다"며 문을 열어뒀다. 이는 남·북·미 연쇄 회담을 개최하겠다는 청와대 구상과 어느 정도는 맥이 닿아 있다. 하지만 김정은은 문재인 정부에 대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미국이 아니라 자기편에 설 것을 노골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청와대가 이날 침묵한 것도 예상보다 높은 김정은의 대남(對南) 비판 메시지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은 문 정부를 향해 '사대적 근성' '외세 의존'이라는 강도 높은 용어도 사용했다.

청와대는 적잖은 충격을 받은 분위기다. 청와대 관계자는 "현재로선 시정 연설에 대해 뭐라고 할 말이 없다"며 "대통령이 15일 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15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김정은 연설에 구체적으로 답하기보다는 "남북 관계 개선을 통해 미·북 대화 재개의 모멘텀을 이어가겠다"는 원론적 입장을 밝힐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가 미국과 북한 모두에 신뢰를 받고 있다는 청와대의 주장도 이번 한·미 정상회담과 김정은 연설로 상당 부분 훼손됐다는 것이 외교가의 분석이다.

그러나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한·미 정상회담에 대해 "잘됐다"고 자평했다. 김정은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 모두 3차 미·북 정상회담에 대해 문을 닫지 않았기 때문에, 중재자 역할에 다시 시동을 걸겠다는 입장이다. 우선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위해 이번 주 대북(對北) 특사 파견을 추진하기로 했다. 대북 특사로는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이 거론되고 있다. 정 실장은 16일부터 시작되는 문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3개국 방문에 동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북 정상회담 성사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다. 우선 북한이 4차 남북 정상회담 요청에 응할지부터 확실하지 않다. 북한은 우리가 3차 미·북 정상회담의 중재자, 촉진자로 나서겠다는 것에 대해 "민족의 편에 서라"며 사실상 거부했다. 정부는 북한의 비핵화와 미국의 제재 해제를 단계적으로 이행하는 '굿 이너프 딜' 중재안을 내세웠다. 하지만 미국은 일괄 타결(빅딜) 원칙을 유지했고, 북한도 이날 제재 해제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한·미가 모두 거부된 모양새가 된 것이다. 문 대통령으로선 남북 정상회담으로 김정은을 만나더라도 3차 미·북 회담장으로 이끌어낼 선물이 마땅치 않다. 남북 관계 개선 명목으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 등 대북 제재를 넘어선 남북 경협을 추진할 경우 한·미 동맹 훼손은 물론 국제사회에서 고립될 수도 있다.

남북 정상회담 시기로는 판문점 회담 1주년이 되는 4월 27일이 검토됐었다. 하지만 이번 주 문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방문 일정 등을 고려하면 5월에나 가능할 것으로 청와대는 전망하고 있다. 회담 장소도 문제다. 남북은 작년 9월 평양 정상회담 때 김정은의 서울 답방에 합의했지만, 하노이 미·북 회담 결렬 이후 상황이 급변했다. 우선 김정은 서울 방문에 찬반으로 갈렸던 작년과 달리 현재는 김정은 서울 답방을 위한 국내 여건이 호의적이지 않다. 김정은도 미·북 회담 결렬로 서울 답방에 나설 명분이 없다. 이 때문에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판문점에서의 '원포인트 회담'이나 평양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이 이번에도 평양을 방문할 경우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이어 문재인 정부 내내 '평양 정상회담'이라는 남북 간 불균형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조선일보 A3면
네이버구독하기

오늘의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