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평생 단 한 번뿐인 만남

주희 엣나인필름 기획 마케팅 총괄이사
입력 2019.04.15 03:00
주희 엣나인필름 기획 마케팅 총괄이사
아버지를 따라 영화를 보러 다니곤 했다. 일곱 살 무렵엔 아버지의 긴 바바리코트 자락에 숨어서 청소년 관람 불가였던 '겨울 여자'를 본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주말 저녁이면 정영일 평론가가 추천하는 '주말의 영화'를 봤고 '금지된 장난' '모정' '애수' '카사블랑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같은 고전 명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아버지가 녹음한 영화음악 카세트 테이프를 들으며 영화 제목 맞히기 게임도 했다. 가장 신나는 놀이였다.

아버지는 지금은 안 계시지만 그때의 기억들 때문에 나는 지금도 영화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0대 일본 유학 시절에도 영화는 일상이었다. 자주 찾던 곳은 '명화좌(名画座)'. 고전영화를 상영하던 극장이었다. 이곳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나루세 미키오처럼 일본 거장 감독의 작품을 만났다. 의자는 삐걱거리고 낡았으며 앞에 사람이 앉으면 스크린을 보기 힘든 정도였지만 그 극장의 공기와 분위기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아마도 그때부터 극장을 하고 싶은 꿈이 생겼던 것 같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행위를 '일기일회(一期一會)'라 생각한다. 일생의 단 한 번뿐인 만남이다. 복제 예술로서의 영화가 어쩌면 살아있는 생명체같이 그날의 기분이나 영화관의 분위기, 함께 본 사람에 따라 일기일회의 특별한 만남을 주는 것이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곳을 응시하며 눈물을 흘리고 웃으며 감정의 연대를 공유할 수 있는 곳. 바로 극장이다.

4월 비수기는 극장가엔 잔인한 달이다. 영화 박스오피스는 곤두박질치고, 예술영화나 한국 독립영화의 경우는 이보다 처참하다. 젊은 관객들은 넷플릭스나 유튜브 플랫폼으로 이동하고 있다. 유튜브에 열광하는 젊은 세대는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두근거림보다 새 콘텐츠를 손쉽게 보는 경험에 더 익숙할 것이다. 극장 존폐의 위기설까지 나오지만 그래도 난 영화와 극장의 미래를 믿는다. 영화와의 '일기일회'를 원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딘가에 있을 테니까.



조선일보 A23면
베르나르 뷔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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