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살롱] [1189] 동남아 산악지대의 아나키스트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콘텐츠학
입력 2019.04.15 03:14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콘텐츠학
베트남 하노이에서 서북쪽으로 6시간 정도 침대 버스를 타고 가니까 '사파(sapa)'라는 산악지대가 나왔다. 고지도에 나오는 한자 지명은 사파(士巴)이다. 평균 해발이 1600m이다. 물가가 싸고 연중 기온차가 크지 않다. 여름엔 선선하고 겨울엔 따뜻하다. 노르웨이, 독일, 네덜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사람들이 겨울철에 추운 날씨를 피해 이쪽으로 많이 온다. 1~2개월씩 산속 민박집에서 머물며 한가롭게 트레킹을 즐긴다. 유럽 문명이 주는 꽉 짜인 압박감, 즉 문명의 시스템이 주는 강박감을 해소시켜 주는, 못사는 나라 특유의 소박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60~70년대의 농촌 풍경 비슷하였다. 방목하는 흑돼지도 마당과 골목에 돌아다니고, 물소도 풀을 뜯으며 어슬렁거리고, 닭 우는 소리, 흙과 나무로 얼기설기 지은 집들도 친근감을 준다. 기후도 좋고 계단식 농토도 있어서 자급자족하기에 충분하다.

알고 보니까 베트남의 사파는 조미아(Zomia)의 동쪽 끝에 해당한다는 문화인류학자들의 학설이 있었다. 조미아는 동남아시아의 고산지대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태국,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일대의 북부 고산지대에는 국가 권력의 압박을 피해 도망쳐 나온 탈주민들이 숨어 살던 지역이 있었다. 국가 권력은 징병, 세금, 부역으로 백성들을 쥐어짰다. 이러한 착취와 압박을 피할 수 있는 해방구가 조미아였다는 주장이다. 아나키스트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조미아의 서쪽 끝으로는 인도 북부 지역까지 확장된다. 중국의 한무제(漢武帝) 이후로 국가 체제가 확장되면서 남쪽에 살던 사람들이 징병과 세금을 피해서 끊임없이 동남아시아의 산악지대로 도망을 간 셈이다. 중국의 운남성과 접경지대에 위치한 사파도 바로 그러한 지역이다. '조미아,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제임스 C 스콧, 이상국 번역)은 이 분야 좋은 안내서이다. 이 책에 의하면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왕궁으로부터 300㎞, 그리고 걸어서 5일 정도 걸리는 범위 내에만 국가 권력이 작동되었다고 한다. 그 밖은 통제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특히 고도가 높은 산악지대는 아나키스트의 공간이었다. 1년 중 3~4월은 너무 더워 활동이 어렵고, 5~10월은 폭우가 쏟아지는 우기라 군대 진격이 어려운 기후 조건이었던 점도 아나키스트에게는 유리한 조건이었다. 동남아시아 산악지대가 20세기 이전까지 '조미아'였다는 관점에서 바라보니까 새로운 통찰이 온다. 지리산은 청년 시절 나의 조미아였다는….



조선일보 A33면
베르나르 뷔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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