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극장 가서 이미지 정치하는 대통령… 그후 영화에 남은 '이념 낙인'

박돈규 기자
입력 2019.04.12 15:29

대통령의 영화 정치

일러스트= 안병현
서가(書架)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독서 취향과 생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상식은 영화 감상에도 통한다. 하물며 최고 권력자라면 어떨까. 대통령은 시간 때우러 극장에 갈 만큼 한가하지 않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볼지 설계하는 팀이 따로 있다. 동행인과 관람평까지 일거수일투족이 정치적 메시지다. 웃음도 눈물도 한숨도.

YS와 DJ의 선택은 1993년 '서편제'였다. 처음으로 100만 관객을 모은 한국 영화다. 대통령을 비롯해 거물급 정치인의 영화 관람이 어떤 해석을 낳고 정치에 활용된 게 '서편제'부터라고 영화인들은 말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해 5월 청와대 춘추관으로 임권택 감독과 배우 김명곤·오정해씨를 초청해 '서편제'를 보고 이런 평을 남겼다. "이 정도면 세계에 내놔도 되겠다. 문화 대국으로 가는 것도 신한국 건설의 하나다."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돌아온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영화를 챙겨 보고 "우리 민족의 한은 원한이나 절망이 아니라 뭔가를 이뤄내려는 몸부림"이라고 했다.

역대 대통령은 저마다 '영화 정치'를 했다. 국가보훈처는 최근 "국민 대다수가 김원봉의 독립 유공자 서훈을 원한다"며 영화 '암살'(2015)을 1200만명이 봤다고 했다. 항일 무장투쟁을 한 의열단장 김원봉(1898~1958)은 광복 후 월북해 북한 정권 수립과 6·25 남침을 주도한 사람이다. 김일성 밑에서 국가검열상(장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조국 해방 전쟁(6·25)에서 공을 세웠다"며 노력 훈장까지 받았다. 보훈처가 국가 정체성 논란을 자초한 것이다. "최고급 독립 유공자 훈장을 달아드리고 술 한잔 바치고 싶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뜻과 무관하지 않다는 비판이 나온다.

역대 대통령의 영화 코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일반 상영관을 찾은 첫 대통령이다. 차별화된 서민 행보로 읽혔다. '왕의 남자' '맨발의 기봉이' '밀양' '길' '괴물'…. 관람 목록도 폭이 넓었다. 2007년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화려한 휴가'를 보곤 "가슴이 꽉 막혀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계속 많은 사람이 볼 것 같은 영화"라고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팀을 그린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 이례적으로 흥행한 독립 영화 '워낭 소리' 등을 관람했다. 2008년 '우생순'에 대해선 "메달 색깔이 문제가 아니라 도전 정신을 갖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샐러리맨 성공 신화를 일군 대통령다웠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뽀로로 극장판'을 시작으로 한국·캐나다 합작 애니메이션 '넛잡', 천만 영화인 '명량'과 '국제시장'을 보았다. 창조 경제나 애국심이라는 키워드로 묶인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제시장'에 감동했다며 "공동체는 이렇게 역경 속에서도 건전하게 발전해나갈 수 있다"는 평을 남겼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유세 기간에 "매달 한 번씩 영화나 연극 등을 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런) 역할을 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다. 극장에 가면 눈물을 흘리곤 한다. 공감 능력이다. '광해, 왕이 된 남자' '변호인' '국제시장' '연평해전' '판도라' '택시운전사' '1987' 등이 그의 눈물샘을 건드렸다.

문 대통령은 영화 정치에 능하다. 2015년 '연평해전'을 관람하고 "우리 영토와 영해가 장병들의 숭고한 목숨과 피로 지켜졌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면서 "희생 없이 안보와 평화를 지키는 세상을 만드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했다. 보수와 중도층을 의식한 발언이었다. 취임 후 첫 영화로 '택시운전사'를 보곤 "광주 민주화 운동이 늘 광주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젠 국민 속으로 확산되는 것 같다. 이런 게 영화의 힘"이라고 말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1987'은 고 박종철씨의 형, 고문 경찰 정보를 외부에 전한 교도관과 함께 봤다. 이날 무대에 오른 대통령은 "우리가 노력하면 세상이 바뀐다"고 했다.

영화 보고 정책으로?

문 대통령은 국회의원이던 2014년 대형 마트 노동자 문제를 담은 '카트'를 관람했다. 그는 "참여정부 때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촉진하고자 비정규직보호법을 만들었는데, 비정규직 양산법이라는 비판과 함께 뼈아픈 비판을 받았다"며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취임 직후 인천공항공사로 달려가 '공공 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선언했다.

영화 '판도라'를 보고 눈물을 흘린 그는 "신고리 5·6호기를 취소시키고 원전 추가 건설을 막겠다"고 했다. 정권을 잡자 탈원전 정책을 폈다. 원전에서 일어날 수 있는 폭발은 핵폭발이 아니고,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본 수증기에 불과하다. 국내 원자로엔 수소 폭발을 막는 장치가 추가로 설치됐다. 김학노 전 원자력학회장은 "영화와 현실을 혼동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탈원전에 대한 지지가 일시적으로 높았던 것"이라고 했다.

부산에서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2011년부터 환경 운동의 하나로 반핵 영화제가 시작됐다. 영화감독 최공재씨는 "'판도라'를 보고 탈원전을 결정했다고 생각하는 게 지금 우파의 수준이다. 좌파는 오랫동안 준비하다 영화 흥행을 발판으로 대중을 선동한 것"이라며 "이번 김원봉 서훈 추진도 박상실(김좌진 장군 암살자)을 비롯해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를 영웅으로 미화하려는 역사 전쟁의 시작"이라고 했다. 공영방송 MBC는 김원봉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이몽'을 다음 달부터 방영한다.

역사를 취사선택하는 '기억 전쟁'

국가 정체성을 영화 보고 바꿀 수 있을까. 지상욱 바른미래당 의원은 "보훈처에 김원봉 서훈 추진 이유를 묻자 황당하게도 '암살' 흥행을 떡하니 제시했다"며 "대체 어느 나라에서 영화 보고 유공자 공적을 심사하느냐"고 했다. 6·25부터 연평해전, 천안함 폭침까지 대한민국을 지키려고 피를 흘린 분들은 누구를 위해 누구와 싸운 것이냐는 얘기다.

한국 사회에서는 역사를 이념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기억 전쟁'이 벌어진다. 김원봉 일생 중 혁명가적 반 토막을 떠받드는 쪽과 지저분한 반 토막을 지목하는 쪽의 싸움이다. 임지현 서강대 교수는 "삶은 개인도 집단도 굴곡이 많고 복잡하다"며 "무엇을 집단적 기억으로 삼을 때 더 미래 지향적일 수 있느냐는 질문 없이 좌파나 우파나 냉전 틀에 갇혀 있다"고 지적했다. "김원봉을 둘러싼 이런 논쟁이 계속돼 엉터리 주장이 줄어들고 합리적 목소리로 수렴해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그는 말했다. 친일 인사가 지은 교가를 바꾸라고 전교조가 요구한 데 대해서는 "친일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다면 그 역사를 지울 게 아니라 예컨대 미당 서정주 같은 시인이 왜 정치적으로 온당하지 않은 일을 하게 됐는지 질문을 던지는 게 균형 잡힌 교육"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영화라도 '광해, 왕이 된 남자' '판도라'는 좌파 영화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반면 '국제시장' '인천상륙작전'은 '국뽕' 영화라는 공격을 받았다. 한 영화 배급사 대표는 "영화는 사실이 아니라 지어낸 이야기"라며 "상업 영화는 비즈니스라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이야기는 피하는 게 옳다"고 했다.

'암살'에 김원봉은 고작 5분쯤 등장한다는 점에서 보훈처 주장은 침소봉대라는 지적이 많다. 영화 평론가 윤성은씨는 "'덕혜옹주'는 역사적 사실과 달리 낭만적으로 묘사해 흥행에 성공하고도 큰 비판을 받았다"며 "단편적 모습만 보고 김원봉 서훈을 추진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하다"고 했다.

역대 최고 흥행작 '명량'은 2014년 7월 재·보선 선거일에 개봉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사즉생(死則生·죽고자 하면 살 것)'을 외치며 이순신 바람에 올라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탄핵 심판 기간에 김훈 소설 '칼의 노래'를 탐독했고,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탄핵 역풍을 맞은 상황에서 "아직 배가 12척 남아 있다"고 했다. 표가 되겠다 싶으면 대중적인 문화 상품에 무임승차해 그 이미지를 훔치는 게 정치인의 셈법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고.

대통령이 영화 보면 100만명 효과… 쇼로 비치면 역효과
대통령 관람의 '나비 효과'

영화 한 편이 '나비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우연히 문재인 대통령의 영화가 된 '광해, 왕이 된 남자'. / CJ E&M
2012년 9월에 개봉한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가 대표 사례다. 권력 다툼과 혼란이 극에 달한 광해군 8년, 임금 목숨을 노리는 자가 많다. 점점 난폭해지는 광해(이병헌)는 마침내 '보험 상품' 같은 꾀를 낸다. 쏙 빼닮은 자를 꾸며서 왕처럼 앉히는 것이다. 도승지 허균(류승룡)은 말솜씨까지 좋은 하선(이병헌)을 찾아내 궁으로 끌고 간다. 왕이 되어서는 안 되는 남자가 왕의 대역을 맡게 된 것이다.

이 영화는 1232만 관객을 모았다. 대통령 선거 직전이라 바람을 탔다. 충무로가 던지는 '제왕의 자격'에 대한 질문처럼 느껴졌다. 박근혜·문재인·안철수 등 당시 대선 후보들이 초대받았다. 가장 먼저 이 영화를 볼 예정이던 박근혜 후보가 우연히 어떤 사정으로 못 오고 문재인 후보가 먼저 보면서 큰 파장이 일어났다.

문재인 후보는 '광해'가 끝나고 5분 넘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안경을 벗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관람 소감을 묻자 "오늘은 소감을 말 못 하겠다"며 "감명 깊게 봤는데 눈물이 많아져 갖고…"라고 했다. 영화 끄트머리에서 도 부장(김인권)과 허균이 하선을 보내주며 예를 갖추는 장면을 보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제대로 보내주지 못한 게 생각나 눈물을 쏟았다고 알려져 있다. '광해'는 그렇게 문재인의 영화가 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선에서 이겼지만 심기가 불편했다. 이 영화 투자 배급을 맡은 CJ가 박근혜 정부 눈 밖에 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2013년 7월 조원동 당시 경제수석이 이미경 CJ 부회장의 퇴진을 요구했다는 사실도 특검 조사에서 드러났다. 박 전 대통령은 손경식 CJ 회장을 따로 만나 'CJ의 영화·방송이 좌파 성향을 보인다'는 불만을 표했고, 손 회장은 "앞으로 방향이 바뀔 것"이라며 "'명량'처럼 국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화도 제작한다"고 설명했다. CJ는 거액을 투자해 '국제시장' '인천상륙작전' 등 애국심에 호소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대통령이 특정 책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흔들기'라 부른다. 최고의 리더가 골라 보여준 책이라 많이 팔린다. 영화에도 '대통령 후광 효과'가 있을까? 최근하 쇼박스 투자팀장은 "'택시운전사'는 누적 관객이 900만명쯤 들었을 때 문재인 대통령이 보고 화제가 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며 "계량하기 어렵지만 대통령 효과가 100만명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영화 관람은 많은 미디어에 노출되는 감성적인 이벤트다. 허은아 한국이미지전략연구소장은 "대통령은 풀고 싶은 정치적 이슈를 쉽고 긍정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특정 영화를 본다"며 "문 대통령은 이 스토리텔링부터 동선, 메시지까지 영화 정치를 잘하는 편이지만 '쇼'로 비칠 경우 역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B3면
미래탐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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