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판사들만 生業 있나

박국희 사회부 기자
입력 2019.04.13 03:09
박국희 사회부 기자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구속 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이 한 달째 진행 중이다. 그런데 그간 이 재판에 증인으로 채택된 십여명의 현직 판사 중 지금까지 딱 한 명만 출석했다. 나머지는 모두 '내 재판 일정과 겹친다'는 이유로 불출석했다. 자신이 맡은 재판 날짜와 겹치지 않아도 '재판 준비를 미리 해야 하기 때문에 출석할 수 없다'고 사유를 댄 판사도 있다. 그사이 임 전 차장 재판은 계속 늘어지고 있다.

그들의 불출석 사유에는 이해할 만한 측면이 분명 있다. 임 전 차장 재판에 나가느라 자신의 재판을 갑자기 연기하면 소송 당사자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현직 판사라는 '신분'은 충분히 고려할 만한 이유다. 하지만 미리 재판 일정을 조정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판사들은 보통 일주일에 이틀 정도 재판한다. 임 전 차장 재판에 출석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면 재판 날짜를 조정하기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판사보다 덜 중요한 일을 한다고도 볼 수 없는 의사나 소방관·경찰관은 물론 하루하루 생업(生業)에 바쁜 서민들도 법원에 증인으로 채택되면 법정에 나가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는다. 일반 회사원 중에 "그날 회사에 중요한 미팅이 있다"며 법원의 증인 출석 요구에 불응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임 전 차장 사건 재판부는 증인으로 채택된 판사들의 불출석 사유를 거의 다 받아들이고 있다. 지난 9일 재판에 증인으로 채택된 A판사가 불출석했는데 재판장은 "알아보니 A판사는 수·금요일에 재판 일정이 있더라"며 해당 요일을 피해 다음 증인 신문 기일을 잡아주는 '배려'를 했다. 그 판사의 신문 기일은 다음 달 말로 연기됐다.

이런 분위기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재판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 전 대통령 사건을 맡은 항소심 재판부는 증인 출석에 불응한 이학수 전 삼성전자 부회장, 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등의 실명을 법원 홈페이지에 게시하고 안 나오면 구속영장까지 발부하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결국 이들은 차례대로 법정으로 나오고 있다. 건강 문제로 거제도에서 요양 중이라는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출석을 독촉하고 있다. 물론 이들이 증인 출석을 의도적으로 피하려 한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판사들이 일반인에게는 서릿발 같고, 동료 판사들에겐 봄바람 같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사법 시스템은 사회 구성원 모두의 존중을 토대로 유지된다. 또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판사들부터 그 시스템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본인들도 증인 출석을 기피하면서 일반 시민들의 법정 출석을 독촉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 것 아닌가.



조선일보 A26면
베르나르 뷔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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