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사회] 이 정부에 法과 절차는 장식품인가

최원규 사회부 차장
입력 2019.04.09 03:15

대통령은 法 위에서 수사 지휘… 진상조사단은 조사 내용 흘려
경찰은 막무가내 자료 요구… '적법 절차' 무시, 달라진 게 없다

최원규 사회부 차장
현 정권이 법과 절차를 대놓고 무시하는 경우를 요즘 특히 많이 보게 된다. 이래도 되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장자연·김학의·버닝썬' 사건을 콕 집어 철저한 수사를 지시했다. "공소시효가 끝난 일도 사실 여부를 가리라"고 했다. 검찰청법에는 법무부 장관만 구체적 사건에 대해 검찰총장을 지휘할 수 있게 돼 있다. 검찰 독립을 위한 조항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법 위에 서서 사실상 수사 지휘를 한 것이다. 유럽에선 정치 권력의 수사 지시가 금기시돼 있다. 프랑스에서는 2013년 법을 바꿔 특정 사건에 대한 법무부 장관의 검찰 수사 지휘권도 폐지했다. 이 정권은 반대로 가고 있다.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는 실무 조사기구인 진상조사단이 김학의 사건 등 조사를 위해 기간 연장을 요구하자 지난달 12일 '연장 불가' 방침을 밝혔다. 이미 세 차례나 기간을 연장했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엿새 뒤 갑자기 '연장 수용'으로 입장을 바꿨다. 검찰은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별장 성 접대' 의혹을 2013년과 2014년 두 차례 수사해 무혐의 처분한 바 있다. '증거 불충분'이 이유였다. 그 뒤 새로운 결정적 증거가 나왔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난달 29일 검사 13명으로 수사단을 꾸려 3차 수사에 나섰다. 이 모든 일이 대통령 지시 때문에 벌어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현 정권은 야당 시절 '하명(下命) 수사'를 그렇게 비판하더니 정권 잡고는 똑같이 하고 있다.

대검 훈령인 진상조사단 운영 규정에는 조사 결과 보고서를 검찰총장에게 제출하고, 조사단원은 직무상 알게 된 내용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고 돼 있다. 그러나 사건 관련자들이 조사단에서 했다는 진술 내용이 언론을 통해 수시로 흘러나왔다. 피의 사실 공표와 다를 게 없다. 조사단 총괄팀장이라는 어느 변호사는 얼마 전 방송에까지 나왔다. 조사단은 김 전 차관을 소환한다는 내용을 기자들에게 알리기까지 했다. 당시 김 전 차관은 피의자 신분도 아니었다. 그를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그에게도 인권이 있는 것 아닌가. 과거 검찰의 잘못을 규명한다는 조사단이 규정을 무시하며 그 잘못을 따라 하고 있다.

경찰은 지난달 한 인터넷 매체에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프로포폴 투약 의혹이 보도되자 해당 병원에 경찰관을 보내 며칠 밤을 새우게 하면서 관련 진료 기록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범죄 혐의가 있으면 내사를 거쳐 압수 수색 영장을 받아 집행하면 될 일이다. 그게 법이고 절차인데 무시한 것이다.

그런 정권과 수사기관을 견제해야 하는 게 사법부다. 하지만 크게 다를 게 없다. 지난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자체 조사한다며 판사들의 컴퓨터를 당사자 동의 없이 강제로 개봉했다. 영장 없이 판사 사무실 서랍을 뒤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난달엔 대법원장이 그 의혹으로 기소된 현직 법관 6명을 재판 업무에서 배제했다. 당사자들이 혐의를 부인하고 징계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징계성 인사 조치부터 한 것이다. '법관은 징계 처분에 의하지 않고는 정직·감봉 등 불리한 처분을 받지 않는다'고 돼 있는 헌법을 무시한 측면이 크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1966년 연쇄 성폭행범 어니스트 미란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경찰이 그에게 묵비권 등을 고지하지 않았다는 '사소한' 잘못을 '무겁게' 받아들인 것이다. 인권을 위해 적법 절차를 강조한 대표적 판결로 꼽힌다. 그 점에서 법과 절차를 장식품처럼 여기는 듯한 현 정부의 행태는 전혀 사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조선일보 A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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