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88만원 세대'와 '167만원 세대'

이인열 산업1부 차장
입력 2019.03.29 03:14
이인열 산업1부 차장

'88만원 세대'는 '헬조선' 현상을 촉발시킨 핵심 개념이자 2007년 나온 책 이름이기도 하다. 당시 우리나라 20대 비정규직의 평균 임금이 88만원이라며, 이들이 취업난과 비정규직 공포에 시달린다는 게 요지였다. 또 다른 88만원 세대의 근거는 당시 시간당 최저임금 4320원이었다. 하루 8시간, 월 25일 일하면 받게 되는 월급 86만4000원을 '88만원 세대'와 동일시한 것이다. 11년이 지난 올해 시간당 최저임금은 당시보다 2배에 가까운 8350원이다. 그렇다면 헬조선이란 프레임에서 조금이라도 탈출했을까. 알다시피 '헬조선'의 분노는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덜해지지 않았다. 현 정부가 명운을 걸고 밀어붙이는 '최저임금 1만원'에 도달하면 달라질까. 매년 10%대 이상이던 최저임금 인상률이 정체되거나 후퇴하면 감속에 따른 상실감이 더 커질 가능성도 있다. "마라톤 거리가 42.195㎞인 데도 근거가 있는 법인데, 시간당 최저임금 1만원이 돼야 하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푸념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모든 을(乙)이 갑(甲)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 갑시다."

현 정부의 최저임금 정책을 지지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최근 읽어 본 글이다. 희망을 강조한 취지다. 최저임금을 급등시켜도 일정 부분 여론의 지지를 받는 데는 이런 희망과 꿈의 비전 덕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 모든 을이 갑이 되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중소기업 전문가인 김세종 전 중소기업연구원장은 "갑을 프레임의 한계는 을이 늘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상황에서 을인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는 갑이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저임금 후폭풍에 주목받았던 자영업자이다. 상당수가 영세사업자인 데다 대기업 프랜차이즈 업체에 수수료를 내기도 하는 이들은 대표적인 '을'이다. 그러나 최저임금 관련해서는 알바생의 고용주인 '갑'이란 사실이 부각된 것이다. 그래서 맨 먼저 최저임금 인상 속도에 반발한 것도 자영업자였다. 이를 두고 '을'과 '을'의 전쟁이 났다는 얘기가 나왔을 정도다. 우리 사회는 유독 갑의 을에 대한 반칙이 심했다. 그 반칙은 반드시 없애야 한다. 문제는 그게 을을 없애는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싸고 편의점 알바생을 대상으로 한 각종 설문조사에는 늘 '인상을 반대한다'는 응답이 15~20%쯤 있다. 도대체 어떤 알바생이 돈 올려준다는데 반대할까 궁금했는데, 상당수는 '창업을 목표로 일하는 알바생'이라고 들었다. 을이 갑이 되는 순간 규제와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된다면 누가 갑이 되려고 할 것인가. 더욱이 을이 없는 갑이 어찌 존재하는가. 억울한 을을 줄이되, 갑이 되려는 꿈을 허망하지 않도록 만드는 정책이 진짜 을들을 위한 정책일 것이다.



조선일보 A3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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