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엔 구찌·루이비통 없지만… 이 남자가 있다

최보윤 기자
입력 2019.03.27 03:01

'직장인의 교복' 띠어리 창업자 앤드루 로젠

"패션은 언론처럼, 뭐든지 가장 선두(forefront)에 있어야 해요. 새로운 세대의 사고방식과 라이프 스타일이 어떻게 변하는지, 최전선에서 탐구하고 제품에 반영해야 하니까요. 트렌드를 선도하는 한국에 온 건 지금 가장 적절한 선택이었습니다."

앤드루 로젠은 "셔츠와 바지는 띠어리를 입지만 재킷은 다른 브랜드를 입는다"면서 "띠어리 제품이 내구성이 좋고 어디든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고 웃었다. /조인원 기자
서울에 온 미국 패션 브랜드 띠어리(Theory) 창업자 앤드루 로젠(62)은 "그 무엇이든 다 안다, 더 이상 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인생에서 은퇴해야 할 때"라면서 "나이 들수록 배울 게 더 많이 보여 난 행복하다"고 했다. 최근 한남동 띠어리 부티크에서 가을 겨울 컬렉션을 선보인 그는 "원단 차이도 깐깐하게 따지는 한국 소비자들을 보니 더 좋은 옷 만들기 위해 죽을 때까지 노력해야겠더라"며 웃었다.

1997년 로젠이 창업한 띠어리는 단아하면서도 활동성 있는 스타일 덕분에 '직장인의 교복'이라 불린다. 원단 회사를 운영한 할아버지와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는 디자인보다 원단의 중요성을 먼저 배웠다. "1990년대 인터넷과 휴대폰이 세상에 나오면서 혁신의 변곡점을 맞았지요. 여성들도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게 된 때였고요. 기능적이면서도 아름답고, 어떤 의상과도 어울리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의 작업복(workwear)이 필요하다는 걸 간파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첨단 라이크라 원단을 의류에 접목시켰고, 잘 늘어나지만 몸에 잘 맞고 늘어지지 않는 바지로 히트를 쳤다. 로젠 덕분에 패션계엔 '컨템퍼러리(동시대적인)'라는 카테고리가 생겼다.

/띠어리
3대째 패션 가문을 이끌며 창업에도 성공한 그의 별명은 '의류 왕(garment king)'. 2000년대 뉴욕을 패션계 중심으로 끌어올린 주역으로도 꼽힌다.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느냐 여부는 디자이너에게 달렸지요. 젊은 디자이너들만이 패션계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유니클로의 야나이 다다시 회장에게 2003년 회사를 팔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확보한 자금 중 상당액을 뉴욕 신진 디자이너 육성에 쏟아부었다. 세계적 브랜드로 성장한 랙&본, 앨리스&올리비아, 프로엔자 스쿨러 등이 그가 발굴하고 투자한 브랜드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그가 뉴욕 패션계에 투자한 돈만 1000만달러(약 113억원)에 달한다. 미국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는 "미국엔 구찌나 LVMH가 없지만 대신 앤드루 로젠이 있다"고 했다. 로젠은 "짧은 시간에 성공한 패션 회사는 많아도 오랫동안 그 성공을 유지한 회사는 많지 않다"며 "차이는 결국 사람에게 얼마나 투자하는가"라고 했다. 그에게 '투자가' 대신 '멘토'라는 애칭이 붙는 이유다.

요즘 그는 창의(創意) 사업가들을 찾아다니고 새로운 문화를 습득하는 데 빠져 있다. "지금도 좋은 친구로 지내는 야나이 회장은 항상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걸 줄기차게 강조하지요. 창의적인 이들을 찾아 에너지를 얻는 것이 변화의 기본입니다." 온라인 주문 시스템으로 안경 업계 판도를 바꾼 와비 파커와 '신발업계 애플'로 불리는 올버즈 등에서도 영감을 받는다. "디지털 시대엔 매장이나 파트너 없이도 소비자와 교류하며 물건을 팔 수 있습니다. 그만큼 소비자를 만족시키기 어려워졌고요. 서울의 젊고 우아한 에너지를 흡수해 띠어리는 또 한 번 진화할 겁니다."


조선일보 A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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