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 간 이승만, 美 독립 성지서 '한인의회'… 상하이로 건너간 김구 "임정의 문지기를 하겠소"

필라델피아·상하이=이한수 기자
입력 2019.03.22 03:25

[4월 11일, 임시정부 100년] [이승만·김구의 나라 만들기]
[1] 임정의 처음과 끝을 함께하다 - 1919년 봄, 두 巨人

1919년 3·1운동으로 수립된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 김구는 마지막 주석으로 임시정부의 처음과 끝을 함께했다. 이 기간 둘은 줄곧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신뢰했다. 독립한 나라를 만들고자 두 사람은 1945년 해방 때까지 미국과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일부에서 둘을 대립 관계로 규정하는 것은 과거 역사를 현재 정치에 이용하는 '역사 정치'일 뿐이다. 오는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아 워싱턴·하와이·필라델피아, 상하이·항저우·충칭 등 두 거인(巨人)의 활동 근거지를 찾아 대한민국을 만들기까지 겪은 고난과 역경을 되돌아본다.

[1919년 4월 美 필라델피아의 이승만]

동포 150여명 모여 '대한공화국 수립' 알리는 결의문
가랑비 흩뿌리던 날, 독립기념관까지 2㎞ 시가 행진

3·1운동 소식이 미국 한인들에게 전해진 때는 1919년 3월 9일. 이승만은 당시 동부 필라델피아에 있었다. 6년 전부터 5000명 교민이 사는 하와이에서 교육·언론 활동을 하다 두 달 전 본토로 건너갔다. 한국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려는 길이었다. 이승만은 독립 호소가 힘을 얻으려면 한인이 먼저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의회(Korean Congress)를 열어 독립을 선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기 한 달여 전이다.

필라델피아는 '독립'을 상징하는 곳이다. 미국 독립을 선언하고 헌법을 제정한 독립기념관이 이곳에 있다. 이승만은 시내 작은 극장을 빌렸다. 리틀 시어터(Little Theater). 지금도 저녁마다 연극 공연이 열린다. 현재는 '플레이스 앤드 플레이어스(PLAYS AND PLAYERS)'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난 1월 23일 오후 2시쯤 찾았을 때 극장 문은 닫혀 있었다. 건물 사진을 찍는데 관리인이 쪽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1층 250석, 2층 50석 규모다. 100년 전과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한인의회는 1919년 4월 14~16일 열렸다. 사흘간 150명이 모였다. 서재필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여러 결의문을 채택했다. 대한공화국이 수립됐다는 것, 미국은 한국의 영토 보전과 독립을 약속한 1882년 맹약(조·미수호조약)의 당사국이라는 내용 등이다.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과 파리 회의 등에 보냈다. 참가자들은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기념관까지 행진했다. 가랑비가 흩뿌리는 날이었다.

리틀 시어터에서 독립기념관까지 거리는 약 2㎞. 100년 전처럼, 인디펜던트호텔과 뮤지컬펀드홀을 거쳐 워싱턴스퀘어로 이어지는 로쿠스트 거리를 따라 걸었다. 필라델피아 한인교회 황준석(71) 목사가 동행했다. 45년째 필라델피아에서 사는 황 목사는 "독립기념관으로 행진한다면 이 길이 자연스럽다"고 했다.

이승만은 독립기념관 앞에서 영어로 번역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참석자와 함께 '대한공화국 만세' '미 합중국 만세'를 삼창했다. 일행과 함께 기념관에 들어가 1787년 조지 워싱턴이 미국 헌법 선포 때 앉았던 의자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황 목사와 찾았을 때 기념관 문은 닫혀 있었다. 경비원은 "연방 정부 셧다운(일시 폐쇄)으로 휴관 중"이라고 했다. 100년 전 이승만이 앉았던 의자는 여전히 전시하고 있다 한다.

[1919년 4월 中 상하이의 김구]

임정, 4월11일 대한민국 국호 정하고 이승만 총리 선출
이틀 뒤 도착한 백범, 경무국장 맡아 임정 통합에 기여

김구가 상하이에 도착한 때는 1919년 4월 13일.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 프랑스 조계로 모여들고 있었다. 3·1운동 이전 100명이었던 상하이 한인 수는 500명으로 늘어났다. 김구는 3·1운동 때 황해도 안악 청년들의 만세운동 참여 권유를 사양했다. 일제 감시를 피해 망명하려는 뜻이 있었다. 3월 29일 기차를 타고 중국 안동(현 단둥)으로 넘어갔다. 7일간 머물다 배를 타고 4일 항해 끝에 상하이 푸둥(浦東)에 도착했다.

지금 푸둥 지역은 글로벌 도시 상하이를 상징한다. 동방명주, 금융센터 같은 고층 빌딩이 즐비하다. 김구가 도착한 1919년 4월은 푸둥 맞은편 와이탄(外灘)에 유럽식 건물이 막 생기던 때였다. 지금은 유명 관광지가 된 와이탄의 서양식 건물엔 '우수 역사 건축' 표지가 붙어 있다. 지난달 27일 거리를 걸으며 조사해보니 김구가 도착한 이후인 1920년대 건물이 더 많았다. 오성홍기가 건물마다 휘날리고 있었다.

김구는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이미 발족해 있었다. 현순·손정도·신익희·이회영·이시영·이동녕·이광수·신석우·조완구·여운형·김동삼 등 임시의정원 29명은 4월 10일부터 밤샘 회의를 거쳐 신석우 발의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무기명 투표로 이승만을 정부 수반인 국무총리로 선출했다. 이튿날인 4월 11일 오전 10시 만세 삼창을 부르고 해산했다.

임시정부가 탄생한 곳은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 양옥집이다. 현재 서금이로에 해당한다.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 1919년 8월부터 10월까지 사용한 두 번째 청사는 서금이로와 십자 방향으로 만나는 회해중로(옛 하비로)에 있었다. 상하이 지하철 13호선 회해중로역 1번 출구 건너편에 있는 의류 매장 'H&M' 건물이 청사 자리였다.

김구는 이 청사에서 경무국장에 취임했다. 8월 12일이었다. 내무총장 안창호를 찾아가 "임정의 문지기를 하겠소" 했더니 준 직함이었다. 임정 통합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임정을 주도하던 안창호는 "상해 임시정부와 동시에 한성 임시정부가 발표되어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 민족에 두 개 정부의 존재를 의심케 한다"며 통합을 강조했다. 임시의정원은 회의를 거쳐 9월 11일 한성 정부를 기본으로 하는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탄생시켰다. 한성 정부의 집정관총재이자 상하이 정부의 국무총리 이승만을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조선일보 A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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