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어지는 '적폐 재판'… 소송비 대려고 줄줄이 집 매각

조백건 기자 김은정 기자
입력 2019.03.15 03:02 수정 2019.03.15 10:26

박 前대통령·임종헌 前법원행정처 차장, 변호사비 마련 위해 집 팔아
김기춘, 한채 팔고 나머지 한채도 내놔… 박병대 前대법관, 동기들이 보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판사로 30년 일했다. 대법관 후보 1순위로 꼽혔다. 그러다 2017년 초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터지자 스스로 법복(法服)을 벗었다. 당시 그의 재산은 18억원 정도였다. 이 중 12억원(66%)은 가족과 살고 있던 서울 서초동 아파트였다.

임 전 차장 가족은 최근 이 아파트를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구속 상태로 재판받고 있는 임 전 차장의 변호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검찰이 임 전 차장을 수사한 뒤 만든 수사 기록은 20만쪽이다. 쌓으면 20m 높이다. 그의 가족이 최근 한 법무 법인을 접촉해 사건을 맡아 달라고 했더니 "수사 기록이 방대하다"며 수십억원을 요구했다고 한다. 다른 곳도 비슷했다. 전 재산인 집을 파는 것 외엔 다른 수가 없었다.

현 정권 검찰이 전(前) 정권의 행정부 인사들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 인사들 신상을 샅샅이 캐 재판에 넘기면서 이렇게 집 팔아 변호사비 대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한 변호사는 "지금처럼 검찰이 트럭에나 실을 수 있는 분량의 기록으로 특정인을 기소하고 이후 재판이 1년 넘게 이어지면 웬만한 부자도 빈털터리가 된다"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2017년 '최순실 국정 농단'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하자 서울 삼성동 자택을 팔고 이사해 30억원을 마련했다. 변호사 비용을 염두에 둔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검찰이 박 전 대통령에게 적용한 혐의가 20가지에 이르고 수사 기록도 12만쪽이어서 변호인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일했던 김기춘 전 실장도 비슷한 시기 구속됐다. 그는 지금까지 2년 넘게 재판받고 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화이트리스트' 사건 등 4건이 넘는 민·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그의 재산은 2015년 기준 38억원 정도였다. 법조계 관계자는 "김 전 실장이 처음에는 예금으로 버티다가 수사·재판이 길어지자 집 두 채를 모두 내놓은 것으로 안다"고 했다. 그는 서울 평창동에 10억여 원짜리 단독주택, 경남 거제시에 1억여 원짜리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중 거제도 아파트는 팔렸다. 주로 변호사 비용으로 쓴 것으로 전해졌다. 평창동 주택은 아직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검찰은 지난달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을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박 전 대법관 역시 검찰 수사 단계에서 이미 가진 돈을 거의 다 써 집을 팔 처지에 몰렸다고 한다. 법원 관계자는 "대학 동기인 변호사들이 변호사비에 보태라고 수천만원을 모아 줬지만 본인이 사양하고 있는 걸로 안다"고 말했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2016년 구속됐다. 그의 청와대 업무 수첩은 박 전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안씨 역시 2년 넘게 미르·K스포츠재단 강제 모금 관련 재판을 받고 있다. 현재 세월호 특조위 활동을 방해했다는 혐의로도 재판받고 있다. 그의 지인은 "(안씨) 가족이 소송 비용에 쪼들려 서울 강남 아파트를 팔려고 생각 중"이라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의 '문고리 3인방 측근' 중 한 명으로 꼽혔던 정호성 전 청와대 비서관도 서울 삼성동 아파트를 잃을 뻔했다고 한다. 검찰 수사를 거쳐 지금까지 재판을 받으면서 아파트 대출금을 제때 내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정씨 지인은 "헤드헌터(인재 스카우트) 사업을 하는 그의 아내 힘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법조계에선 검찰이 트럭 분량 수사 기록으로 이들을 기소한 것은 대부분 직권 남용 혐의를 적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이 조항은 공무원의 직무상 권한 범위가 어디까지인지가 모호하다. 그래서 검찰이 유죄를 받아내고자 오만 가지 내용을 넣어 기소했다는 것이다. 한 변호사는 "이러면 변호사 비용이 늘어 당사자들이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조선일보 A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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