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칼럼] 3만弗 고지에 오르자 '경제 지옥'이 펼쳐졌다

입력 2019.03.15 03:17

日의 '잃어버린 20년'은 소득 3만불 때 시작됐다
우리도 3만불 고지에 올라선 순간 세금 우습게 아는 포퓰리즘 정부가 등장했다

박정훈 논설실장
우리가 소득 3만달러를 달성한 것은 일본보다 26년 늦었다. 1992년, 그러니까 한국 소득이 8000달러이던 해 일본은 3만달러 장벽을 돌파했다. 인구 5000만명 이상 국가 중 최초였다. 그해 일본은 격변기를 맞고 있었다. 전후(戰後) 최대 정치 스캔들이 터지고, 고속 성장을 지탱해온 '1955년 체제'가 해체 수순에 접어들었다. 세계 최고의 부자 나라로 등극하는 것과 동시에 체제의 모순이 터져 나왔다. 그야말로 역설이었다.

더 기막힌 역설은 경제에서 벌어졌다. 그해 3월 도쿄 평균 주가가 2만엔 밑으로 내려갔다. 5개월 뒤엔 1만5000엔 선마저 붕괴됐다. 집값·땅값이 폭락하고 자산 거품이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며 꺼져 내렸다. 취업 빙하기가 본격화되고 청년들이 '잃어버린 세대'로 불린 것도 이때부터다. 이후 약 20년간 일본 경제는 끝없는 침체와 불황의 늪에 빠져들었다. 저성장은커녕 성장률 제로의 무(無)성장이 이어졌다. 이른바 '잃어버린 20년'의 시작이었다. 소득 3만달러의 신세계에 도달한 순간 악몽 같은 경제 지옥이 펼쳐졌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방향 잘못 잡은 정책 실패의 필연적 결과였다. 그해 여름 일본 정부는 11조엔(약 110조원) 규모의 천문학적 경기 부양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자산 폭락이 멈추지도, 소비와 투자가 살아나지도 않았다. 진단이 잘못됐는데 효과가 나타날 리 없었다. 일본 경제가 수렁에 빠진 것은 구조적 결함 때문이었다. 경제가 중병에 걸렸는데 진통제 투여로 회복될 순 없었다. 그래도 일본 정부는 손쉬운 돈 풀기 정책을 멈추지 않았다. 주범은 무능 정부였다. 판단 착오에 빠진 포퓰리즘 정부가 어설프게 거품을 터트려 놓고 장기 불황의 지옥문까지 열어젖혔다.

일본의 세금 퍼붓기는 1990년대 내내 계속됐다. 초대형 대책을 이름만 바꿔 7년 새 9차례나 쏟아냈다. 도로·철도 뚫고 공항 짓는 토목 건설 사업이 주류였다. 사업 규모를 다 합치면 114조엔(약 1200조원)에 달했다. 웬만한 나라의 1년 GDP보다 큰 돈이 수요도 없는 인프라 공사에 투입됐다. 텅 빈 공공 시설이 곳곳에서 흉물 덩어리로 변했다. 자동차 대신 산짐승만 다닌다는 '다람쥐 도로'가 우후죽순 생긴 것도 이때다. 소비를 촉진한다며 전 국민에게 현금과 상품권을 나눠주기도 했다. 말 그대로 세금을 물 쓰듯 썼다.

10여 년 헛돈 쓴 끝에 일본은 세계 최악의 적자 국가가 됐다. GDP 대비 국가 부채비율이 무려 240%로 올라갔다. 부도 위기를 맞았던 그리스(182%)를 제치고 압도적 세계 1위가 됐다. 지금 일본의 재정 상태는 지속 가능한 구조가 아니다. 1년 예산의 32%를 빚내서 조달하고, 이자 갚는 데만 지출의 23%를 쓴다. 20년 뒤엔 국가 예산 전액을 이자 상환에 써야 한다는 계산도 나와 있다. 언젠가 일본 총리가 TV에 나와 자신이 "세계 제일의 빚쟁이"라고 자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농담만은 아닐 것이다. 잘못된 정책이 불과 10여 년 사이에 나라를 빚더미에 올려 놓았다.

일본 경제가 회생 실마리를 잡은 것은 역설적으로 돈 푸는 경기 부양을 그만두면서부터였다. 2000년대 초 고이즈미 정부가 토건 사업 중단을 선언했다. 대신 공공 부문 수술과 규제 완화 같은 구조 개혁 정책을 밀어붙였다. 폐쇄적 노동시장도 수술대에 올렸다. 그 노선을 이어받은 아베 정부는 더욱 강하게 구조 개혁 페달을 밟았다. 그러자 민간 활력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기업 경쟁력이 호전되고 일자리도 늘어났다. 세금 퍼붓기를 그만두자 장기 불황이 끝났다. 나라 재정을 거덜내는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고야 탈출에 성공했다.

정부가 정책 방향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한 나라 경제가 거덜 나기도 한다. 잘나가던 나라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도 순식간이다. 일본이 그걸 보여주었다. 일본의 장기 불황은 무능 정부가 자초한 '정책 불황'이었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이 일본과 판박이 같다. 일자리 못 만드는 고용 대책에 54조원을 쓰고, 효과 없는 자영업 대책에 6조원을 투입했다. 전국을 토목 공사판으로 만든 것도 똑같다. 타당성 조사까지 면제해주며 지역 민원 사업에 24조원을 쓰겠다고 한다. 경쟁력 높이고 성장 동력 키우는 문제엔 관심이 없다. 규제 혁신은 말뿐이고 노동 개혁은 손조차 대지 않고 있다. 문제만 생기면 오로지 세금, 또 세금뿐이다. 정부가 문제를 만들고 실패를 만회하려 또 세금을 퍼붓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그 끝은 뻔하다.

26년 전 일본은 소득 3만달러에서 '잃어버린 20년'을 열었다. 우리도 3만달러 고지에 오른 순간 세금 우습게 아는 포퓰리즘 정권이 등장했다. 무능한데 자기 확신은 강한 이 정권은 심지어 '20년 집권'을 하겠다고 한다.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조선일보 A38면
베르나르 뷔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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