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정신은 '포용'… 오늘의 분열 극복해야

조규태 한성대 교수·한국민족운동사학회장
입력 2019.03.14 03:01

[3·1운동 막전막후] [8] 올해 100주년이 던진 과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 1920년 3월 1일 자에 실린 유영(柳榮)의 시에는 '아아, 이날에 한족(韓族)이 붉은 피로써 자유를 부르짖는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시구처럼 3·1운동은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얻기 위해 일으킨 혁명적 사건이었다. 국내외에 배포된 도쿄의 2·8독립선언서, 3·1독립선언서, 만주·연해주의 독립선언서 등을 통해 '독립'과 '자주' '자립'을 선언했다.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대에 벌어진 위정척사운동, 동학농민운동, 개화운동, 애국계몽운동, 일제강점기의 비밀결사운동은 일부 계층의 주도로 개별적으로 전개됐다. 이에 반해 3·1운동은 서로 다른 운동에 참여했던 세력이 합세해 계층과 계급, 남녀와 노소, 사상과 종교의 차별 없이 전 민족적으로 벌어졌다. 이는 세류(細流)들이 모여 대하(大河)를 이룬 것과도 같았다.

계층과 계급, 남녀와 노소, 사상과 종교의 차별 없이 전 민족적으로 전개된 3·1운동 정신은 분열이 일상이 된 오늘의 대한민국에 소중한 자산이 되고 있다. 사진은 3·1운동 100주년이었던 지난 1일 서울 독립문 앞에서 시민들이 만세 삼창을 하는 모습. /고운호 기자

3·1운동은 근대적 개념의 국민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혁명적 사건이었다. 대한제국의 신민(臣民)은 국망 후 왕조를 다시 세우려는 복벽주의(復辟主義)적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나 점차 근대적 개념의 국민으로 변환됐다. 민족 대표 33인을 배출한 천도교·기독교·불교는 조선시대에 배척받거나 천시됐다. 하지만 민족운동의 대표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관리와 양반 출신의 인물들도 입교해 근대적 국민이 주도하는 단체로 변모했다.

3·1운동을 추진한 주역들은 거사 후 국민대회를 열고 임시정부 수립을 구상했다. 제정(帝政)이 아닌 민정(民政)이었다. 천도교 손병희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전쟁이 끝나면 세계의 상태가 일변하여 세계에 임금이란 것이 없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3·1운동 이후 "독립 후 어떤 정체의 나라를 세울 계획이었는가?"라는 판사의 신문에도 그는 "민주 정체를 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나뿐 아니라 일반적인 생각"이라고 답했다.

3·1운동의 독립 열망을 바탕으로 국민은 1919년 3~4월 연해주에 대한국민의회,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에 한성정부를 세운 데 이어 1919년 9월 이를 통합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들은 국호(國號)를 '대한민국'으로 하고, 임시헌장에서 정치 체제를 '민주공화제'로 하여 '황제의 나라가 아닌 국민의 나라'임을 밝혔다.

3·1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종교 단체나 일반인이 운영하는 보통학교와 중학교·고등보통학교, 전문학교, 일본과 중국 등지의 대학에서 수학하면서 서구의 근대적 사상을 수용했다. 지역적으로는 평안도를 비롯한 서북 지역 출신이 많았는데, 이 지역 국민 중에는 '자립적 중산층'이나 자본가가 적지 않았다.

3·1운동은 중국·인도 등 외국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우리 독립운동의 전개에도 큰 기여를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등은 매년 3·1절에 기념식을 열고 거족적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만주 무장독립운동단체의 통합, 신간회와 독립당촉성회 결성, 좌우 합작적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도 3·1운동의 경험에 힘입은 바 크다.

올해 100주년을 맞은 3·1운동의 정신이 앞으로도 우리 국가와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소중한 정신적 유산으로 작용하기를 희망한다. 사상·이념·지역·계층의 갈등을 씻어 국민적 통합을 이루고, 이념 간 대립을 해소해 민족 통합과 남북통일을 이루는 것! 그것이 후손으로서 3·1운동 선열에 대한 도리를 다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공동기획: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조선일보 A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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