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하는 '도심 속 별장'이 최고지

허윤희 기자
입력 2019.03.14 03:01 수정 2019.03.14 08:38

해방촌에 미니별장 지은 한재훈씨

은퇴 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일과 회사, 조직과 관계에서 벗어나 비로소 '나'를 들여다본다. 어떻게 행복하게 노후를 보낼 것인가. 3년 전 대기업을 은퇴한 한재훈(63·고려대 겸임교수)씨는 오래전 접어둔 행복 찾기에 돌입했다.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었어요. 멀리 있는 전원주택 말고, 언제든 책 읽고 글 쓰고 친구 초대할 수 있는 '도심 속 세컨하우스'를 원했죠."

서울 용산 해방촌 ‘해방구’ 내부 모습. 테라스가 딸린 3층 거실 위로 다락이 보인다. /이진한 기자

지난달 완공된 서울 용산 해방촌 '해방구'는 한씨의 오랜 꿈이 실현된 집이다. "사람들 불러서 밥해 주는 게 취미이자 행복"이라는 그는 "벌써 다섯 차례 손님을 치렀다"며 웃었다. 이희승의 수필 '딸깍발이'를 좋아해 어릴 때부터 남산 밑에 사는 걸 동경했다. 매일 아침 대치동 집을 나와 401번 버스 타고 이 집으로 출근한다고 했다. "은퇴한 친구들이 경기도 양평 등에 전원주택을 많이 짓는데, 다들 하는 얘기가 처음에 삼겹살 구워 파티하면 끝이래요. 너무 멀어 가기 쉽지 않고 여름엔 잡초만 무성해 애물단지 된다고요. 반면 여긴 천국이지요. 남산 둘레길 걷기도 좋고, 남대문시장 가서 소머리국밥도 사먹을 수 있고요."

외벽은 짙은 회색을 입힌 외단열재로 거친 느낌을 냈고, 화단에 조팝나무·미선나무를 심었다. /이진한 기자

지상 3층에 대지 면적 35.66㎡, 연면적 52.84㎡. 2017년 계약해 설계에만 1년, 공사 1년이 걸렸다. 건축가 임태병(48) 문도호제 소장이 설계했다. 카페 비하인드, 어쩌다가게 동교 등을 만들어 홍대 문화를 주도한 건축가다. 임 소장은 "설계를 시작할 땐 늘 건축주에게 요구 사항을 적어달라고 한다. 대부분 이메일로 보내주시는데 한 선생님은 포스트잇 6장에 빼곡히 적어주셨다"고 했다.

한씨는 이 집에 바라는 것들을 단어로 적었다. 초대·음식·만찬·대화·글쓰기·사유·걷기·해방구…. '작은 공간에서 우아하고 편리하게 살기 위해서는 건축학적 기능과 영리한 구성이 필수'라는 요구 사항도 적었다. 공사 내내 가족 회의를 수차례 했다. 회계학 전공한 큰딸과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둘째 딸이 마감재까지 꼼꼼히 챙겼다.

그렇게 탄생한 집은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을 모두 갖췄다. 1층은 주방 겸 식당, 2층은 서재, 3층은 거실로 꾸몄다. 1층은 이 집에서 가장 공적인 공간이다. 5.9평 안에 냉장고, 오븐, 식기세척기, 인덕션을 갖췄고 후드를 겸한 큼직한 조명등을 달아 운치를 더했다. 식탁은 주방 공간과 단차를 둬서 좁은 공간이 풍부하게 보이는 효과를 냈다. 한씨는 "한 달에 서너번 친구와 친척을 초대해 밥해 주는 게 목표"라며 "한 달에 한 번 가족 조찬 모임도 열 계획"이라고 했다.

한재훈(왼쪽)씨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2층 서재에서 건축가 임태병 소장과 대화하는 모습. /이진한 기자
위로 올라갈수록 사적인 공간으로 바뀐다. 2층은 서재 겸 연구실, 3층은 발코니가 딸린 거실이다. 다락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명당. "계단 옆에 창을 내 고개를 돌리면 동네가 보이고, 위로는 하늘이 보인다"며 "책 한 권 들고 와서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이 집에선 내가 조금만 부지런하면 행복해집니다. 쓸고 닦고 요리하고, 가족 눈치 보지 않고 친구를 초대할 수 있고 내 시간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다는 게 즐거워요."

임 소장은 "처음엔 도심 속 세컨하우스 콘셉트로 짓기 시작했지만, 가족 회의 거치고 완공돼 가면서 이 집의 가능성이 확장됐다"며 "나만의 공간에서 가족→친지→친구→이웃까지 언제든 개방하는 장소로, 베이비붐 세대에게 집짓기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줄 것 같다"고 했다.
조선일보 A22면
미래탐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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