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이토록 마음 아린 역사를 보았는가

양승주 기자
입력 2019.03.13 03:00

여명의 눈동자

그저 담담하게 풀어내기만 해도 우리 역사는 이토록 아픈 것이었다. 서울 신도림 디큐브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3·1운동 100주년 기념 창작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노우성 연출)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시간을 오롯이 비춘다. 허를 찌르는 반전이나 피를 끓게 하는 악인의 등장 없이도 과거는 묵직한 돌처럼 그것을 잊고 살던 현대의 관객을 짓누른다. 김성종의 동명 소설과 이를 원작으로 한 MBC 드라마(1991)를 무대로 옮긴 이 작품은 방대한 역사를 2시간 안팎에 솜씨 좋게 압축한 동시에, 사건과 인물은 입체적으로 살려내 뮤지컬만의 매력을 톡톡히 보여준다.

'여명의 눈동자'는 일제강점기부터 6·25전쟁까지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스며든 비극을 조명한다. /수키컴퍼니
1944년 중국 난징,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온 '여옥'과 조선인 학도병 '대치'는 조선인끼리 아픔을 공유하다 사랑에 빠진다. 여옥이 대치의 아이를 임신하자 두 사람은 탈출을 시도하지만,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헤어지게 된다. 사이판으로 끌려간 여옥은 위생병 '하림'을 만나 함께 미군에서 일하며 잠시 행복한 순간을 맞지만, 해방 직후 공산당원이 된 대치와 재회하면서 모든 상황이 뒤바뀐다. 제주 4·3사건, 6·25 전쟁 등 수년간의 굵직한 사건들이 숨 가쁘게 흘러가지만, 인물들의 사연에 적절하게 녹여낸 덕에 버겁지 않게 다가온다.

내공 있는 배우들의 열연이 작품의 울림을 배로 키운다. 몇 초 만에 전석을 매진시키는 '스타 배우'는 없지만, 문혜원·김보현·테이 등 주연들의 탄탄한 연기가 두 시간 내내 반짝인다. 여옥 아버지 역의 김진태 등 중·장년 배우들의 무게감 있는 연기와 앙상블의 찰진 호흡도 단출한 무대를 빈틈없이 채웠다. 이 작품은 제작 과정에서 투자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개막이 예정보다 3주 미뤄지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제작비 부족으로 무대 구성을 간소화했고, 본래 대극장 공연이지만 무대 위에 간이객석을 배치해 마치 중·소극장 공연처럼 진행되는데 오히려 그 덕에 작품의 흡인력이 커졌다. 단 일반석에서는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기 어렵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세 사람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예상 가능하듯 결국 비극으로 치닫는다. 만약 이런 아픔이 없었다면 이들이 누렸을 행복한 순간을 상상한 극의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더욱 마음을 아리게 한다. 동시에 이런 아픈 역사가 있어 가능했던 현재의 안온함을 돌아보게 한다. 역사 기념이라는 취지로 보더라도 잘 만든 작품이다. 4월 14일까지.


조선일보 A21면
미래탐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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