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제주비'와 '소주성' 망상

임민혁 논설위원
입력 2019.03.13 03:15

'소주성'처럼 앞뒤가 바뀐 발상… 비핵화 없이 한미 갈등만 불거져
北 정권 최악의 신용불량자… 뭘 믿고 제재 먼저 풀자는 건가

임민혁 논설위원
지난해 말 남북 산림 협력과 관련해 한·미가 얼굴을 붉힌 적이 있다. 미국은 우리가 북에 보내려는 제초제는 문제 삼지 않았지만, 이를 싣고 갈 트럭이 북한 땅에 들어가는 것이 제재 위반 소지가 있다고 했다. 안보리 결의 2397호 7항 '이동 수단의 대북 공급·이전 금지'를 이유로 댔다. 우리는 "트럭은 물건을 갖다주고 바로 돌아올 건데 뭐가 문제냐"고 했지만 미측은 계속 제동을 걸었다고 한다. 미국 주장은 과한 측면이 있다. 그 논리라면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방북 때 타고 간 비행기도 문제가 된다. 그런데도 트집을 잡은 속내가 기막히다. 미국은 '한국이 과거처럼 차량·기계설비를 북한에 갖고 가 대여해주는 형식으로 사실상 넘겨주려는 것 아니냐. 트럭에서 기름을 빼서 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했다고 한다. 동맹인 우리를 못 믿는 정도를 넘어 북한과 한통속으로 본 것과 다름없다.

대북 제재 의지에 관해 우리가 외부에 비치는 모습이 이렇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아랑곳없이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재개 방법을 찾아내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숙제를 던져놓고 외교부를 닦달하고 있다. 우리는 북핵 위협의 가장 큰 당사자다. 그런 나라에서 제일 똑똑하고 일 잘한다는 외교관들이 '북핵 폐기 방안'이 아니라 국제 결의를 우회해 북한을 도와줄 '묘수'를 찾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다. 한 간부는 "한·미 워킹그룹 회의 때는 매번 우리가 제재 관련 이거저거 양해해달라고 하고 미국은 안 된다며 감정싸움 벌이는 장면이 되풀이된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한·미 관계에서 균열음이 새 나올 수밖에 없다.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을 전후한 대미(對美) 소통은 참사 수준이었다. 북핵 담당자들이 일찌감치 현장에 달려가 미측과 접촉했지만, 결과적으로 동맹국의 의중, 협상 카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미국 실무 대표는 회담이 결렬된 뒤 우리 상대에게 전후 상황을 설명하지 않고 하노이를 떠났다. 우리 당국자는 5일 뒤에야 미국에 가서 설명을 들었지만, 그러는 사이 외교장관은 사실상 '미측이 북에 요구한 플러스 알파가 정확하게 뭔지 모른다'고 실토했다. 한 전직 외교부 장관은 "과거 '귀동냥 외교'라고 욕먹을 때와 비교해도 지금이 더 나은 상황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귀동냥 외교'는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 미·북 협상에 끼지 못한 우리 외교관들이 매일 밤 미국 대표 숙소에 찾아가 브리핑을 받아야 했던 '흑역사'를 말한다.

지금 한·미 간 불화를 초래하고 있는 우리 정부의 대북 정책은 '제재 완화 주도 비핵화'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소득 주도 성장'처럼 앞뒤가 거꾸로 된 발상이다. 유엔 안보리와 미국이 부과한 제재는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에 투입할 물품과 자금을 최대한 차단하기 위한 수단이다. 북 정권은 '핵 무력 완성'을 위해 이를 자초해 놓고 이제 와서 "인민 생활에 지장" 운운하며 피해자인 척, 억울한 척을 한다. 그러기 때문에 북한이 제재 완화를 원한다면 먼저 비핵화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게 국제사회의 공통된 인식인데, 문재인 정부만 '먼저 제재 완화로 북에 성의 표시를 하자'고 하고 있는 것이다.

비즈니스에서는 거래 순서를 바꾼 '외상'도 가능하지만, 이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보장됐을 때 얘기다. 북핵 협상에서 김씨 정권이 최악의 신용 불량자임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김정은이 이번에는 자기 자식들까지 걸고 "핵무기 이고 살기 원치 않는다"고 했다지만, 과거에도 북한의 말은 늘 그럴듯했다. 처음 당할 땐 속인 사람에게 비난이 집중되지만, 그런 일이 너덧 번 반복되면 속은 사람이 '호구'라고 손가락질받기 마련이다.


조선일보 A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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