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ESSAY] '백수하세요' 인사가 큰 실수가 된 이유는

조규선 한서대 대우교수
입력 2019.03.08 03:10
조규선 한서대 대우교수

정월 초이튿날 친구 어머니를 오랜만에 찾아뵙고 큰절을 올렸다. "백세 시대입니다. 백수(白壽)하십시오." 그런데 친구 어머님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갑자기 말씀이 없으셨다. 무안한 표정으로 친구와 함께 방을 나온 이후에야 아차, 큰 실수를 한 것을 깨달았다. 친구 어머니는 96세인데 요즘도 비닐하우스에서 상추·쑥갓을 키우며 농사일을 하신단다. 백수(99세)하시라는 인사를 3년 후 돌아가시라는 의미로 받아들이셨던 것 같다.

정월 대보름을 맞아 인사차 들른 동네 경로당에서 만난 박영규(104) 선생님에게는 "만수무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요즘 어른들에게 "오래 사세요"라고 하면 대개 "오래만 살면 뭐하나. 건강해야지"라고 대꾸하신다.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라고 해야 좋아하신다. 장수 시대를 맞아 어르신께 드리는 인사말도 바뀌었다.

우리 주위에 구순(九旬·90세)이건 백수건 나이를 잊은 듯 '청년'으로 사는 분들이 많다. 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 '노인' '어르신'이다. 남자 노인을 높여 가리키는 '옹(翁)'이 사라진 대신 '젊은 노인'이란 말이 생겼다. 영원한 청년으로 살아가는 이분들의 비결은 무엇일까.

몇 년 전 초등학교 시절 은사인 이기헌(92) 선생님은 구순 잔치에서 "30여년 전 정년퇴임한 후 꿈을 갖고 노력했다면 무언가 성취할 수 있었을 터인데 무척 아쉽다"고 후회하셨다. 그러면서 "지금부터라도 새로운 '꿈'을 갖고 '도전'하는 삶을 살겠다"고 했다. 선생님의 새로운 꿈은 삶의 지표가 되는 한시(漢詩)를 지어 자손에게 전하는 것이다. 선생님은 요즘도 밤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동양 고전을 뒤지며 한시에 쓸 좋은 어귀를 찾고 있다. 오는 4월 아들·딸과 손자·증손자를 포함한 자손 36명과 지인들에게 한시를 선물한다는 목표다.

고교 선배인 시인 이생진(90) 선생도 꿈과 열정을 가지면 늙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얼마 전 서른여덟 번째 시집을 냈다. 청년 못지않은 열정이다. 전국 3000여개 섬 중 1000여곳을 발품을 팔아 다녀 '섬 시인'으로 불린다. 그는 자신의 시를 '발로 쓴 시'라고 한다. 요즘도 한두 달에 한 번 섬을 찾는다. 하루 1만5000보 걷기를 숙제하듯 빼놓지 않는다고 한다. 선생님은 "그대로 머물러 있어선 안 된다. 드러누워 있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매일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열고 보면 모든 게 새롭게 보인다"고 하셨다.

고교 선배인 김언석(91) 선생님은 평생 모은 재산 상당 부분을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얼마 전 방문한 선생님 사무실은 변변한 가구도 없이 썰렁했다. 평생 아끼고 근면하게 살아온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젊은 시절 염전과 정미소를 운영한 선생님은 "내가 잘나서 돈 번 게 아니다. 종업원들이 믿고 따라주어 큰 탈 없이 사업을 키울 수 있었다. 그렇게 번 돈이니까 당연히 나눠주어야 하지 않나"라고 했다. 장학금 20억원을 기탁하기로 발표한 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고 했다.

'70세 도전' '80세 꿈' '90세 나눔'.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초고령 사회에서 행복하고 성공적으로 늙어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조선일보 A32면
미래탐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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