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선명성'과 '기회주의' 사이

곽창렬 사회정책부 기자
입력 2019.03.04 03:12
곽창렬 사회정책부 기자
9년 만에 진보 정권을 만난 노동계에 대해 잠시나마 헷갈렸던 적이 있었다. 정권에 따라 주판알을 튀기며 정치적인 계산에 따라 움직여 온 한국노총은 대정부 투쟁을 외쳤다. 반면 투쟁만 외쳤던 민주노총은 잠시 조용했던 시기가 있었다. 이른바 '촛불 청구서'를 내밀며 '쌍용차 해고자 복직' 등을 얻어낸 시기가 그때였다. 노사정(勞使政)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를 놓고, '탈퇴'를 운운한 한노총과는 달리 '참여'를 추진했던 민노총의 모습도 낯선 장면이었다. 그런데 지난달 19일 '탄력근로제'에 대한 경사노위 합의 이후 두 노총은 원래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가는 모양새다.

전통적으로 민노총은 위원장의 힘이 약하다. 또 중요한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는 조직이다. 민노총 위원장은 100만 조합원 전체의 직선제 투표로 선출된다. 그만큼 위원장의 힘이 강해야 하는 게 정상이지만, 민노총 위원장은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라는 비아냥거림을 듣는 게 현실이다. 위원장보다는 계파의 목소리가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지는 조직의 생리 때문이다. 그래서 취임 직후 1년간 김명환 민노총 위원장은 직을 걸다시피 하며 경사노위 참여를 추진했지만, 지난 1월 열린 대의원대회에서 반대파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이제 조직 전체가 다시 대(對)정부 투쟁에 골몰하고 있다.

반면 한노총은 위원장과 집행부의 힘이 강하다. 조직 전체가 이들의 결정을 잘 따른다. 100만 조합원 전체 투표가 아닌 3000여 명의 선거인단 투표로 위원장을 선출하지만, 위원장이 내린 결정에 토를 다는 경우는 많지 않다. 지난 1월 말까지만 해도 탄력근로제를 둘러싸고 정부에 대해 거친 비판을 쏟아냈던 한노총이 막판에는 '어용(御用) 노조'라는 비판까지 뚫어내며 합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일사천리로 움직이는 조직의 생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민노총은 이번 결정에 대해 "이 정도 개악(改惡) 안에 노동조합 대표자가 직권 조인하면 한국노총은 용인할 수 있을지 몰라도 민주노총에서는 지도부 탄핵감"이라고 비아냥대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노총이 이례적인 결단을 내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노총은 이명박 후보 당선이 유력하던 2007년에는 지금의 야권을 지지했지만, 여권에 유리한 상황으로 흘러가던 지난 대선에서는 여권과 공조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노사정에 서명했지만, 이후 정부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이유로 합의를 파기한 전력도 있다. 한 전직 경사노위 위원장이 "이번 경사노위 합의에 대해 정치적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한참을 지켜봐야 한다"고 말한 것도 같은 이유다. 철저히 투쟁을 통해 이득을 챙기는 전투적 실리주의의 민노총과 계산기를 두드리며 협상장과 파업장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한노총의 본질은 현 정부 들어서도 별로 변한 것 같지 않다.


조선일보 A38면
베르나르 뷔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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