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혜진의 영화를 맛보다] 남극 대원을 울게 만든 라면, 그건 그리움이었다

송혜진 기자
입력 2019.02.12 03:01
가스불 위에 냄비를 올리고 물을 팔팔 끓이고 싶어졌다. '남극의 쉐프'(감독 오키타 슈이치)를 보면서다. 영화는 해발 3810m, 평균 기온 영하 54도인 남극 돔 후지 기지에서 생활하는 8명 대원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바이러스조차 살지 못하는 극한의 지방이지만, 대원들은 그곳에서 주먹밥이며 새우튀김 등을 만들어 먹으며 그럭저럭 향수를 달랜다. 그러던 어느 날 조리 담당 마사토(니시무라 준)가 "라면이 다 떨어졌다"는 말을 꺼내자, 대원들 표정이 일그러진다. 마사토가 "대신 게는 잔뜩 있다"고 달래도 소용이 없다. "라면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는 걸…." 한 대원이 끝내 울음을 터트리고 기지는 순식간에 침울해진다.

대체 라면이 뭐기에? 문득 네 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페루에 갔던 때가 생각났다. 작은 발에 고무 신발 하나 신겨서 쿠스코까지 날아갔고 마추픽추를 올랐다. 티티카카 호수도 함께 건넜다. 고산병 없이 씩씩하게 돌아다녔지만, 문제는 떠나기 직전이었다.

/조선일보 DB
열이 나고 구토가 일었다. 고산병 약을 먹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반나절을 꼬박 앓았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공항에 도착했고, 발권을 할 때쯤에야 비로소 한결 나아진 걸 느꼈다. "엄마, 이제 안 아파?"라고 묻는 아이에게 나도 모르게 이렇게 대답하고 있었으니까. "응, 이제 집에 가서 라면 끓여 먹자."

회귀(回歸)의 맛. 라면은 결국 그런 음식이 아닐까. 대단한 요리도, 엄마 손맛이 느껴지는 한 끼도 아닌, 누가 어떻게 끓여도 비슷한 감칠맛과 균일한 염도를 내는 한 그릇 식사이지만. 속속들이 알 것 같지만, 그래서 종종 못 견디게 그리운 맛. '남극의 쉐프' 속 대원들이 탐스러운 대게보다 라면에 목말랐던 건 그 맛이 한결같고도 대수롭지 않아서는 아니었을까. 일상과 가족, 그리고 떠나온 곳의 냄새가 곧 그런 것일 테니까.

영화를 다 보고 결국 라면 하나를 끓였다. 뜨겁고 칼칼하고 짭조름했다. 늘 먹던 그 맛이어서, 익히 아는 그 맛이어서, 괜스레 눈물겨웠다.


조선일보 A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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