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논란, 자본주의 대국 美의 대선 이슈로

정시행 기자
입력 2019.02.11 03:00

워런 등 민주당 대선 주자들, 시장 통제·富재분배 내세워
트럼프 "美는 사회주의국 안된다" 2020 대선 논란으로 몰고가

미국에서 '사회주의냐 아니냐' 논쟁이 주류 정치권을 강타하면서, 2020년 대선이 사회주의 찬반 대결 구도로 짜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민주당 대선 주자들이 잇따라 국가의 시장 통제와 부의 재분배를 내세운 정책을 내놓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은 '사회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최대 자본주의 국가 미국의 선거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이념적 도전이 이슈가 된 것은 냉전기에도 드물었던 일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10일 "미국 민주당이 수십 년간 소수 극좌파들이 제기했던 정책을 차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주요 대선 주자와 당 지도부가 잇따라 부유세 부과나 저소득층 의료·주택 자금 지원, 대학 무상교육 등 파격적 공약을 내놓으면서다.

미 민주당 유력 대선 주자인 엘리자베스 워런(69) 상원의원(매사추세츠)이 9일(현지 시각) 미 노동운동 발상지인 매사추세츠주(州) 로렌스시에서 열린 자신의 대선 출마 선언 행사에서 지지자들과 손을 잡고 있다.이미지 크게보기
대선 출마 선언한 워런 "부유층 위한 시스템에 맞설 것" - 미 민주당 유력 대선 주자인 엘리자베스 워런(69) 상원의원(매사추세츠)이 9일(현지 시각) 미 노동운동 발상지인 매사추세츠주(州) 로렌스시에서 열린 자신의 대선 출마 선언 행사에서 지지자들과 손을 잡고 있다. 하버드대 교수 출신으로 금융권 규제와 부유세 도입 등 급진적 진보주의를 표방한 워런은 이날“부유층을 떠받치는 부정한 시스템에 맞서 싸우겠다”고 말했다. /AP 연합뉴스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상원의원(매사추세츠)은 9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며 "부유층과 권력자를 떠받치는 부정한 시스템에 맞서 평범한 가정의 삶을 지키는 싸움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부유층에 2~3%의 재산세율을 부과하고, 근로자가 기업 이사회의 40%까지 선임할 수 있도록 하는 공약을 내놨다.

역시 대선 출마를 선언한 카멀라 해리스 상원의원(캘리포니아)은 저소득층을 위한 10만달러 세액 공제와 건강보험의 전면 공(公)보험화, 대형 금융사에 대한 별도의 세금 신설을 공약했다. 코리 부커 상원의원(뉴저지)도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모든 신생아에게 1000달러를 주겠다고 하는 등 미국에선 생소한 현금성 복지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자본주의의 심장인 뉴욕 지역구의 민주당 의원들까지 "공공 인프라에 4조6000억원을 투자하고 모든 구직자에게 일자리를 주자"(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 하원의원)거나 "기업의 자사주 매입 규모를 제한하고 최저임금을 시간당 15달러로 올리자"(척 슈머 상원의원)는 법안을 발의했다.

트럼프 정부는 이런 움직임을 '사회주의'라고 규정하며 공세를 본격화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5일 국정연설에서 "미국은 국가의 강압과 지배가 아닌 자유와 독립에 기반해 건국된 나라로, 앞으로도 사회주의 국가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의 사회주의 정책이 남미에서 가장 잘살았던 베네수엘라를 절망적인 가난과 비참함으로 빠뜨렸다"고도 했다. 백악관은 이미 지난해 10월 '사회주의의 기회비용'이란 보고서를 내 민주당의 정책들을 구소련이나 중국, 베네수엘라에 비견했다.

언론들은 이 '사회주의 위협론'이 보수층을 겨냥한 트럼프 재선 캠페인을 이끌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정치 전문 매체 더힐은 "특검 수사와 낮은 지지율로 고전하는 트럼프가 보수 세력과 중도층을 규합할 슬로건으로 '사회주의라는 악(惡)과의 싸움'을 꺼내들었다"고 했다. CNN도 "트럼프는 국내에선 민주당을 때리고, 대외적으론 베네수엘라 군사 개입을 거론하며 사회주의와 전쟁을 펼칠 것"이라고 했다.

다만 사회주의라는 용어와 개념이 미국 사회에서 예전처럼 터부시되지 않는다는 점이 변수다. 미국에선 사회주의·공산주의가 19세기 말 소개된 후 100년 넘게 주류 정치권에 편입된 적이 없었다. 1980년대 말 동구권 붕괴 후엔 체제·이념 논쟁 자체가 무의미했다. 그러나 2016년 대선에서 '상위 1%와 싸운다'며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버몬트)이 민주당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변화가 감지됐다. 지난해 여론조사 업체 갤럽 조사(복수 응답)에서 민주당 유권자 중 '사회주의를 긍정적으로 본다'는 답변이 57%를 차지해, '자본주의를 긍정적으로 본다'는 47%를 처음으로 앞섰다.

워싱턴포스트는 "사회주의나 냉전을 겪지 않은 세대가 수십만달러의 대학·주택 자금 빚과 저임금, 열악한 사회복지에 고통받으며 나타난 현상"이라며 "젊은이들은 '사회주의'라고 하면 스탈린이나 카스트로가 아니라, 북유럽 복지 국가나 멋진 진보 정치인을 떠올린다"고 했다.


조선일보 A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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