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한국선 커피숍서 책 읽지만… 북한선 정전 걱정 없는 지하철역이 도서관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입력 2019.01.12 03:00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일러스트= 안병현
서울에서 지하철을 탈 때면 자연히 평양 '지철'(북한에서는 지하철을 지철이라고 한다)이 생각난다. 북한의 자랑 중에서 첫째로 꼽히는 것이 평양 지하철이다.

여러 점에서 서울 지하철과는 풍경이 사뭇 다르다. 군사 시설이라 건설도 군대가 했고 운영도 군대가 하고 있다. 지하철역에선 여군이 일한다. 북한에서 제일 복무 환경이 좋은 부대다. 서울 지하철은 지하와 지상 운행 구간이 섞여 있고 평균 깊이가 20여m라는데 평양 지하철은 지하 100m 깊이에 있다. 1970년대부터 북한이 핵전쟁을 준비하면서 이렇게 깊게 건설했다. 핵전쟁에 대비한 시설이다 보니 지상으로 올라오는 구간은 없다. 평양에선 매년 한두 번 반항공대피훈련을 하면서 노인과 어린이까지 몇 분 내로 지하철로 대피하는 훈련을 하는데 100만여 명은 들어가 앉을 수 있다고 한다.

1970~80년대 지하철 공사 땐 터널 공사 장비가 열악하다 보니 수많은 청년이 지하 갱도 공사장에서 죽었다. 그들을 기리기 위해 지하철 전승역 옆엔 지하철도사적관(박물관)이 있다. 유치원 담임 선생님이 스무 살에 지하철건설부대 군관(장교)과 결혼했는데 아이가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남편이 지하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로 사망했다. 선생님이 며칠 동안 울어 학부모들이 위로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역과 역 사이 터널에는 또 다른 터널이 있는데 그 안에 뭐가 있는지는 군사비밀이다. 한국이나 외국 대표단이 지하철을 견학할 때는 고려호텔이 있는 영광역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영광역으로 나와야 한다.

지하철 가격은 10원. 미국 달러와 북한 암시장 교환 비율이 1대8400원 정도라고 보면 거의 공짜나 다름없다. 북한에서 모든 일을 사전에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데 지하철 보수 정비만은 매우 규칙적으로 하며 사전에 공지한다. 역에는 공중화장실이 없다. 지하철에 타기 전에 일을 보고 이용해야 한다. 정 급해 안내원에게 사정하면 지하철역 관리인들이 이용하는 화장실을 안내하지만 매우 불편하다.

내 눈에 서울의 지하철역은 좀 단조로워 보인다. 디자인이 거의 비슷해 표지판을 보지 않으면 어느 역인지 아직도 잘 분간하기 어렵다. 반면 평양 지하철역은 모든 역이 하나의 미술박물관이다. 역마다 김일성의 혁명 역사를 담아 디자인했고, 개선역에는 김일성의 석고상까지 있다.

한국과 가장 다른 쓰임이라면 지하철역이 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도서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일 것이다. 평양시는 정전이 자주 되기 때문에 대학 입시 준비생들은 출근 시간이 지난 오전 10시부터 퇴근 시간이 시작되는 오후 6시 전까지 지하철역에서 공부한다. 퇴근 시간을 잠시 피해 저녁을 먹은 후 다시 오후 8시쯤 모여들어 밤 10시까지 공부하다가 흩어진다. 더위와 추위를 피하는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다. 지하철에는 에어컨이 없지만 지하 100m 깊이에 있어 여름에는 선선하고 겨울에는 따스하다. 한국에선 커피숍이 도서관처럼 쓰이는데 평양에선 지하철역이 가장 좋은 학습 장소인 셈이다.

평양에 살 때 우리 집에서 외무성은 지하철로 두 정거장 거리였다. 하지만 지하철은 거의 안 타고 45분 정도 걸어서 출퇴근했다. 출근 시간 '쓰리군(소매치기)'이 많기 때문이었다. 쓰리군들은 주로 건장한 청년들인데 몇 명씩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손가락 사이에 면도날을 끼고 여자들 가방이나 남자들 주머니를 찢고선 돈지갑을 훔친다. 그래서 북한 여자들은 끈이 긴 가방을 멘다. 출근 시간 사람들이 붐빌 때는 전동차 안에서 가방을 어깨에 메지 않고 바닥에 길게 내려놓는다. 그래야 안전하다. 또 다른 이유는 냄새 때문이었다. 전기 사정 때문에 환풍 시설을 돌리지 않아 안 좋은 냄새가 난다.

지하철 안에서는 연세 많은 분, 아이 업은 여성(북한에서는 직장 다니는 여성들이 애를 등에 업고 다닌다), 임신부, 장애인이 보이면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하나의 당연한 도덕처럼 돼 있다. 서울 지하철에선 이런 광경을 자주 볼 수 없었다. 과거엔 그렇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조선일보 B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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