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애호박을 살짝 볶아 고명으로 올린 칼국수 번잡스러운 강남에서 신기하게 姃한 맛 내

정동현
입력 2019.01.12 03:00

[정동현의 pick] 칼국수 편

서울논현동 '한성칼국수'

어른이 되기 전까지 칼국수를 밖에서 사먹은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여유 있던 날 혹은 할머니, 그도 아니면 외할머니가 집에 오는 날에 칼국수를 밀어 먹었다. 양가 모두 서울 출신이라 바지락이나 해산물로 국물을 뽑는 일도 없었다. 대부분 닭 육수에 칼국수를 삶고 닭고기를 고명으로 올려 먹었다. 밀가루가 퍼져 중화 소스처럼 끈기가 생긴 국물에 밥까지 훌훌 말아 먹고 미칠 듯한 포만감에 배를 부여잡고 소처럼 방바닥에 누우면 그제야 식사가 끝났다.


소처럼 누웠던 나뿐 아니라 불과 몇 십년 전에는 구호물자로 넘쳐나던 밀가루를 이용해 배를 채우는 수단이었다, 칼국수는. 그러다 취직을 하고 나서 처음으로 돈 주고 사먹기 시작했다. 곡예를 하듯 칼국수를 던져 놓고 가는 종업원과 쩝쩝 소리를 내며 국수를 마시듯 먹는 사람들, 그 틈에서 점심 시간이 갔다. 그도 나쁘지 않았다. 번잡스럽고 불편하더라도 빠르고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다면 그런 점심도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서울 삼청동 '황생가칼국수'에 가면서부터 칼국수에 바지락이 들어가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됐다. 솜씨 좋은 이가 진득이 끓인 육수에 뽀독뽀독 매끄럽게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면을 먹으면 '그래도 사대문 안, 그래도 삼청동'이라는 감상에 젖는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근처 혜화동에 산재한 국시 집들은 조금 더 고즈넉하고 예스럽다. 그중 1969년에 문을 연 '국시집'은 일대의 좌장 역할을 하는 집이다. 수육, 전, 문어 그리고 국수로 구성된 메뉴는 전형적인 안동 국시 본새다. 국물을 보면 간은 삼삼하고 맛은 나른하다. 노랗게 부쳐낸 전은 옛날 번철에 구워낸 것처럼 부드럽게 입에서 풀어진다.


좁은 골목을 타고 올라가 '명륜손칼국수'에 가면 조금 더 힘있는 국수를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영업시간이 딱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1시 30분 사이다. 맛을 보려면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그리하여 잔뜩 올린 소고기 고명, 시퍼런 칼로 슥슥 잘라낸 두툼한 수육 같은 것을 먹다 보면 '이까짓 세상'이라고 호기를 부리며 초록병 따위를 상 위에 올려놓고 싶어진다.

잘 닦은 백자처럼 윤이 나는 서울 한성칼국수의 면발(왼쪽 사진). 이 빛나는 면을 사골 국물에 넣고 푹 끓인 칼국수(오른쪽 사진 가운데)는 흰 티에 청바지만 입은 멋쟁이처럼 미니멀한 맛을 낸다. 모둠전까지 곁들이면 저녁 한때를 보내는 데 모자람이 없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다시 다리를 건너 강남에 가면 1983년 문을 연 '한성칼국수'가 있다. 강남이 텅텅 비어 있던 시절부터 문을 연 이 집에 가면 오래된 드라마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아낙들은 낮은 천장을 어깨에 지고 좁은 주방에서 엉덩이를 부딪혀 가며 음식을 뽑아낸다. 세월을 견디듯 뭉근히 끓여낸 사골 육수 위에 애호박을 살짝 볶아 고명으로 올린 칼국수는 번잡스러운 강남에서 신기하게도 정(姃)한 맛을 낸다.


그 결이 난(亂)하지 않은데도 부족함이 없다. 두꺼운 밀가루 면이 사골 국물에 풀어지면 산미(酸味)가 살짝 번진다. 그 복잡한 맛이 녹아든 국물을 한 입 머금으면 언제나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세상을 똑바로 이겨낸 옛 사람들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정신을 놓고 먹기보다는 한땀 한땀 수를 놓듯 면을 집고 국물을 삼킨다. 곁들여낸 파간장을 조금 풀면 맛에 흥이 돋고 식사에도 속도가 붙는다.


모둠전을 곁들이면 잔칫상을 벌인 듯 마음도 넉넉해진다. 토실한 굴, 탱탱한 새우를 부친 솜씨도 좋지만 가장 입에 붙는 것은 호박전이다. 덩굴에 무심히 달린 호박을 따 툭툭 썰고 기름에 부쳤던 할머니, 먼지 나게 뛰어놀던 시골길, 늘 점잖게 허리에 손을 지고 걸었지만 국수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던 할아버지. 칼국수, 모둠전 같은 음식에 잊었던 기억들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칼국수 한 그릇에 배를 채우고 하루를 이겨낸 사람들이 있었다. 가진 것도 뽐낼 것도 별로 없었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그래서 지지 않은 삶이었다. 단출한 칼국수 한 그릇을 닮은 정갈한 인생이었다.

조선일보 B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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