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금메달 심석희가 겪은 지옥

민학수 논설위원·스포츠부 차장
입력 2019.01.10 03:16

어제 한 지인이 2014년 소치올림픽에서 쇼트트랙 금메달을 땄을 때 심석희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려놓았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여고생 석희는 국가대표 유니폼에 금메달을 목에 걸고 수줍은 듯 웃고 있다. 여드름도 몇 개 눈에 띈다. '이렇게 예쁜 아이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지인은 혀를 찼다. '심석희 성폭행 사건' 탓에 포털 실시간 검색어에도 이름이 맨 위에 올랐다. 석희는 여덟 살부터 스케이트를 탔다. "어린 영혼이 출구 없는 곳에 줄곧 갇혀 있었다"는 탄식도 나왔다.

▶심석희 측 변호인은 그제 이번 일을 세상에 공개했다. "(심석희가) 약 4년간 전 대표팀 A코치에게 상습적인 성폭행을 당했다"고 했다. '4년'은 석희가 만 열일곱이었던 소치 때부터 작년 평창올림픽 직전까지다. 그러자 A씨 측은 "성폭행 혐의는 말도 안 된다"고 부인했다. 이미 A씨는 심석희를 상습적으로 때렸다는 단순 폭행 혐의로 지난해 9월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다. 이번에 폭로된 성폭행은 국가가 관리하는 태릉선수촌과 진천선수촌, 한체대 빙상장 등에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벌어졌다니 아연실색할 일이다.

▶도대체 '코치 선생님'이 뭐길래 이런 일이 벌어질까. 한 선수는 코치를 "절대자"라고 했다. 한번 선수의 길에 들면 공부와 담을 쌓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대회 출전과 상급 학교 진학, 실업팀 진출까지 인생이 걸린 일들이 코치의 말 한마디에 좌우된다고 했다. 또 훈련에 합숙까지 둘은 거의 모든 시간을 같이 보낸다. 한번 눈 밖에 나면 끝이다. 심석희도 "운동을 계속할 생각이 없느냐는 협박을 수시로 받았다"고 했다.

▶미국 미시간대 체조팀과 대표팀 주치의를 지낸 래리 나사르는 무려 30년 동안 여자 선수들을 성적으로 학대한 사실이 드러나 지난해 175년형을 받았다. 그에게 당했던 선수가 나중에 엄마가 된 뒤 용기를 내어 증언대에 나설 때까지 이 사건은 철저히 은폐돼 있었다. 이전까지 나사르는 미국 체조의 공헌자로 칭송받았었다. 결국 시몬 바일스 같은 전·현직 대표 선수 150명이 증언을 이어가면서 진실이 드러났다.

▶지도자와 선수는 주종 관계처럼 비칠 때가 있다. 미투운동에 힘입어 몇몇 피해자가 용기를 냈지만 스포츠 전반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대한체육회와 문화체육관광부는 금메달과 남북 체육 교류 외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듯 지냈다. 심석희가 털어놓은 이 기막힌 사연의 시시비비를 가리고 또 다른 피해자는 없는지 세밀하게 살펴봐야 한다.


조선일보 A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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