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한 공격에, 답을 찾아준 이청용

이태동 기자
입력 2019.01.09 03:01

필리핀전 후반 19분 '조커' 투입
빠른 패스로 상대 수비 흔들며 3분 뒤 황의조 결승골 이끌어

이청용(31)은 한때 박지성을 이을 축구대표팀 차세대 에이스로 꼽혔다.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2골을 넣어 사상 첫 원정 16강을 가장 앞에서 이끌었다. 잉글랜드 볼턴에서 재기 넘치는 플레이를 펼쳐 유럽을 사로잡았고, 명문 클럽팀의 러브콜도 받았다.

좋았던 흐름은 1년 후 산산조각이 났다. 2011년 여름 그는 5부리그 팀과 치른 연습 경기에서 '살인 태클'을 당해 정강이뼈가 심하게 부러졌다. 10개월 정도 쉬는 동안 감각은 무뎌졌고, 복귀 후 소속팀은 물론 대표팀에서도 인상적인 경기를 하지 못했다. 결국 전성기 나이에 접어들었음에도 지난해 러시아월드컵 출전이 불발됐다.

이 패스, 골의 시작이었다 - 그의 패스 한 방이 기다리던 골의 출발점이 됐다. 7일 필리핀전 후반 이청용(17번)이 오른발 바깥쪽으로 땅볼 침투 패스를 넣는 장면. 황희찬(11번)이 이를 크로스로 연결했고 황의조가 득점했다. 힘들었던 필리핀전을 1대0 승리로 이끈 값진 결승골이었다. /허상욱 기자
비극으로 마무리되나 싶었던 옛 에이스의 축구 인생이 UAE에서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이청용은 7일 두바이에서 열린 UAE 아시안컵 C조 첫 경기 필리핀전에 수퍼 서브로 투입돼 황의조의 선제 결승골을 이끌어냈다. 한국은 필리핀을 1대0으로 꺾고 승점 3을 얻었다.

한국-필리핀전은 크게 이청용 투입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었다. 이청용이 벤치에 앉아 있을 때는 답이 보이지 않는 경기가 계속됐다. 전형적으로 상대 밀집 수비에 막혀 말리는 식이었다. 황희찬과 구자철, 이재성 등 2선 공격수는 '무승부도 좋다'는 생각으로 수비벽을 쌓은 상대를 뚫어낼 장면을 만들지 못했다. 도전적인 시도 없이 백패스만 늘었다.

후반 19분 이청용이 출전 기회를 잡으면서 그라운드 공기가 확 바뀌었다.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 선 이청용은 전후방을 활발히 오가며 공간을 만들었고, 정확하고 빠른 패스로 상대 수비를 흔들었다. 패스할 타이밍이 아니면 민첩한 드리블로 돌파를 시도했다.

이청용이 1인 3역을 하며 경기장을 누빈 지 3분 만에 골이 터졌다. 후반 22분 상대 수비 사이로 빠져든 이청용이 이용의 패스를 받은 다음 옆으로 침투하던 황희찬에게 정확히 패스를 찔렀다. 몸동작을 크게 바꾸지 않고 발 바깥쪽으로 공을 차는 고급 기술이었다. 정확한 방향과 세기로 넘어온 패스를 황희찬이 크로스했고, 황의조가 마무리했다. 이날 한국 공격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팀플레이였다.

경기 후 황의조가 공식 MVP로 뽑혔지만, 대부분 전문가는 이청용을 숨은 승리의 주역으로 꼽았다. 한준희 해설위원은 "이청용이 상대 위험 지역에서 빠른 템포로 센스 있는 플레이를 펼쳐 수비 균열이 일어났다. '축구 도사' 같은 옛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고 평가했다.

이날 이청용의 활약은 남은 경기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직 조직력이 완전치 않은 파울루 벤투호(號)는 극단적 수비를 펼친 필리핀에 고전했다. 12일(오전 1시) 2차전 상대인 키르기스스탄을 비롯해 대부분 팀이 한국을 상대로 전원 수비, 소위 '텐백' 전략을 들고나올 가능성이 크다. 필리핀전에서 한국은 과정이야 어땠든 결과적으로 승리했다. 그 해답은 이청용이라는 사실을 감독도 동료들도 알았다.

강력한 우승 라이벌 이란전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란은 8일 예멘전에서 단단한 수비에 화력까지 선보이며 5대0으로 대승했다. 이란과 한국이 각각 조 1위를 하면 결승에서 만나지만, 한국이 조 2위를 할 경우 8강에서 마주친다. 한국과 이란은 1996년부터 2011년까지 5회 연속 8강 대결을 펼쳤다.

필리핀전 후반 부상으로 교체 아웃됐던 기성용은 오른쪽 햄스트링에 경미한 손상이 생겨 일주일 정도 재활이 필요한 것으로 진단됐다. 빠르면 16일 오후 10시 30분 3차전 중국전에 나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 A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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