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 親書와 신년사, 김정은의 이중 플레이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입력 2019.01.09 03:14

김정은 신년사의 경고·협박을 우리 정부 설명에선 찾을 수 없어
北 비핵화 정보 국민에 알릴 때 독점과 왜곡의 유혹 경계해야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북한 김정은이 지난주 보낸 친서(親書)는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 귀하'라는 표현으로 시작된다. 사신(私信)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에게 보낸 것인 만큼 국가는 그 내용을 전부는 아니어도 국민에게 알릴 의무가 있다. 그런데 A4 용지 두 장 분량 친서에서 국민이 확인할 수 있는 건 달랑 넉 줄뿐이었다. 나머지는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 표현에 따르면 '김 위원장이 밝힌 내용을 기초로 요약과 의역'을 해서 설명했다.

민감한 대북 관련 정보를 다 밝힐 수는 없을 것이다. 김 대변인도 "내용을 그대로 전하는 것은 외교관례에 어긋난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사이에 여러 차례 친서가 오갔지만 전문을 공개한 것은 한 차례뿐이었다.

그렇다해도 덕담 일색인 김정은의 친서와 그의 육성으로 직접 들은 신년사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도 되는건지 국민은 혼란스럽다. 청와대가 친서에 담긴 내용을 제대로 알린 게 맞는지 의아해질 수밖에 없다.

"한반도 비핵화 문제도 함께 해결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는 친서에 대한 설명도 의구심을 가중시킨다. '용의'는 거래할 때 쓰는 표현이다.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태도를 결정하겠다는 뜻이다. 용의를 충족할 조건이 친서에 적혀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그 용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김정은의 신년사가 추측할 수 있게 해줬다. 그는 신년사에서 자신의 요구 조건을 제시했고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새로운 길을 모색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렇다면 그간 틈날 때마다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분명하다"고 거듭 강조했던 우리 정부의 확언은 뭐란 말인가.

몇몇 언론은 김정은 신년사가 '지난해 3월 특사로 방북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게 한 말과 배치된다'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연합 훈련이 연례적이고 방어적 성격의 훈련이라는 점을 이해했다"고 한 정 실장의 전언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김정은이 정말 그런 취지로 말을 하긴 했을까. "북한의 핵 포기 의사가 확고하다"는 정부 설명도 마찬가지다. 김정은을 만나고 돌아온 대통령과 우리 정부 측 인사들이 그렇게 전했을 뿐이다. 우리가 직접 들은 김정은의 육성은 그 반대라고 말하고 있다.

문 대통령이 지난해 유럽 순방을 마치고 돌아와 "한반도 평화에 대한 지지를 확인했다"고 했을 때 많은 국민이 귀를 의심했다. '한·뉴질랜드 정상 공동 기자회견' 직후 청와대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도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청와대는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의 말 가운데 "한반도 평화를 위한 문 대통령의 노력과 긴장 완화, 북과의 대화 시작을 축하하며 경의를 표한다"는 내용만 전하고, "뉴질랜드가 2009년부터 대북 인도적 지원을 중단했으며, 북한이 CVID 방식의 비핵화를 해야 한다"는 내용은 뺐다. 기자들이 옆에서 지켜본 회담조차 이런 식으로 편집됐다. 북한과의 접촉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에 뛰어들 때 전쟁 관련 정보를 국민에게 숨겼다. 국제정치학자 한스 J 모겐소는 미국에 싸움을 걸어오는 일본을 '점토로 만든 발을 한 거인'이라고 했다. 석유 생산량이 미국의 700분의 1에 불과하고, GDP는 12분의 1인 일본은 미국의 적수가 아니란 뜻이다.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앞두고 군용자원비밀보호법을 제정해 군사력의 실체도 숨겼다. 역사학자 가토 요코는 저서 '왜 전쟁까지'에서 태평양전쟁 발발 1년 전 항공 연료가 1년치밖에 없던 일본의 국민이 전쟁을 지지했던 이유로 일본 정부의 정보 독점과 왜곡을 꼽았다. 북핵 폐기 과정에서도 이런 파국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나. 문재인 정권은 북한 비핵화 관련 정보를 국민과 나눌 때 독점과 왜곡의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이번 신년사처럼 뒤통수 맞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하다.


조선일보 A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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