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이렇게 선진국이 되어가나 보다

박성희 이화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입력 2019.01.08 03:17

입시·취업에 치여도 公的 의식 잃지 않고 자란 젊은이 많아
김태우·신재민은 '좋은 나라' 위배되는 장면 보고 告發 결행
시민·공공의식 불씨가 번져 先進 대한민국 열어 가길

박성희 이화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새해니까, 좀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그전에 먼저 질문 하나. 만약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시험장에서 부정행위를 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하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1. 부정행위를 알린다. 2. 친구와의 의리를 생각해 못 본 척한다. 수년간 여러 자리에서 질문을 던져 본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선진국 학생들일수록 1번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에게 우정이 덜 중요하거나 친한 친구가 없어서가 아니다. 사적(私的)인 관계보다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의 건강성이 우선한다는 판단 때문이다. 부정행위를 눈감으면 불의가 창궐해 마침내 자신과 공동체가 함께 망하게 된다.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이 함께 잘되는 데 관심이 많다.

반가운 소식은 우리나라 학생들도 주로 1번을 택한다는 것이다. 발전한 자유 대한민국에는 공동체를 생각하는 세련된 생각을 품고 사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입시와 취업에 치이면서도 시민 의식과 공적 의식을 잃지 않고 반듯하게 큰 이들은 대견하기 그지없다.

최근 여러 '공익 제보자' 사건들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특별감찰반원이었던 김태우 수사관은 민간 사찰 의혹을 폭로했고, 전(前) 기획재정부 사무관 신재민씨는 청와대의 민간 기업 인사 개입과 적자 국채 발행 압력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모두 현 정부 안에서 벌어진 일을 내부 공무원이 밖에다 알린 경우다. 파장은 컸고, 대가는 가혹했다. 김태우 수사관은 '미꾸라지'소리를 들으며 조사를 받았고, 신재민 전 사무관은 여당 의원의 악담과 기재부의 고발을 당하고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잘사는 나라의 특징은 이런 '공익 제보자'를 법으로 철저하게 보호한다는 점인데, 우리는 아직 정치권이 자신의 이해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공익 제보자들을 옹호했다 내쳤다 하는 수준이다. 어느 공익 제보자를 옹호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이유는 정치인들의 공적(公的) 의식의 크기가 고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가와 공공을 구분하지 못한다. 권력을 잡으면 정권과 나라를 혼동한다. 그래서 자기가 잘되어야 정권이 잘되고, 그게 나라가 잘되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산다. 권력과 관계없이 사는 보통사람의 눈에 나라와 정권은 엄연히 다른데도 말이다.

공익 제보자들을 보호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각종 위협과 위험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가장 흔한 수법이 '가스라이팅 심리술'이다. 잉그리드 버그먼 주연의 영화 '가스등'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기법은 문제의 화살을 제보자에게 돌려 자아 존중감을 현저하게 떨어뜨려 조정하는 기술을 뜻한다. "네가 본 게 이상한 게 아니라 네가 이상한 거야"라는 식이다. 영화 '가스등'에서는 남편이 아내가 미쳤다고 주장하기 위해 주변을 조작해 아내의 현실감을 망가뜨린다. 주로 소시오패스나 나르시시스트가 즐겨 사용하는 기법으로 심할 경우 상대를 우울증과 자살에 이르게 한다.

현 정부가 좋아하지 않는 정보를 폭로한 김태우 수사관과 신재민 전 사무관은 각각 '미꾸라지'와 '망둥어'로 인간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간신히 인간 취급을 받을 때도 '6급 주사 따위' '업무 라인이 다른 말단'으로 치부되었다. 신 전 사무관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나쁜 머리 쓰며 의인인 척하는" "돈 벌러 나온" "막다른 골목에 이른 도박꾼" 소리를 들었다. 그런 표현을 담은 글을 올려 물의를 빚은 한 여당 의원은 글을 내리면서도 "강단이 없는 사람이라 거론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침을 뱉었다.

그 여당 의원의 현란한 '가스라이팅' 기법에도 불구하고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를 받은 김태우 수사관의 모습은 당당했고, 신재민 전 사무관은 친구 덕에 자살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대하는 좋은 나라의 모습에 위배되는 장면을 목격하고 호루라기를 불었다. 그들에게 나라와 정권은 다른 것이었다. 그게 정상이다. 그들이 온전하도록 참여연대와 공익 제보자 모임 같은 시민단체도 힘을 보태고 있다. 이렇게 적폐가 시나브로 줄어들고, 이렇게 선진국이 되어가나 보다. 그들에게서 약하지만 꺼지지 않은 시민 의식과 공공의식이 아직 우리 사회를 추동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 불씨가 번져 새로운 선진 대한민국을 열면 좋겠다. 북한의 핵은 점점 기정사실화되고 남한의 경제는 점점 쪼그라드는 어수선한 뉴스들 사이에서 희망의 조각들을 애써 건져내본다. 새해니까.


조선일보 A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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