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유머는 듣는 자를 위한 배려… 유머 없는 사장님 말씀은 권력남용입니다"

김미리 기자
입력 2019.01.05 03:00 수정 2019.01.05 18:22

'칼럼계의 아이돌' 김영민 서울대 교수

주황색 털모자, 보랏빛 스웨터. 김영민 교수는 컬러에 예민했다. 모자가 불룩 솟았다고 하니 “원래 이렇게 쓰고 다니니 그냥 찍어 달라”고 했다. 다만 남들이 알아보는 게 불편하다며 “최대한 알아볼 수 없게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주황색 털모자, 보랏빛 스웨터 차림으로 나타난 그가 기자의 녹색 외투를 보며 말했다. "주황, 보라, 녹색. 한국 사회에서 저평가된 색들이네요. 저는 이런 색들의 가치가 재평가됐으면 좋겠어요." 정치학 교수와 '색깔 논쟁'을 할지는 몰랐다. 김영민(53)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탁구공 같은 그의 칼럼처럼 첫 대화부터 예상 경로를 벗어났다.

김 교수는 요즘 젊은 층에서 가장 뜨거운 글쟁이 중 하나다. 지난 추석 한 신문에 실린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이 결정적이었다. 명절 때 친척들의 과도한 관심 퇴치법으로 추석의 근본적인 정체성을 반문해 보라는 내용이었다. 명절 스트레스에 끙끙 앓던 이들이 환호했다. 한 달 전 펴낸 첫 산문집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어크로스 刊)는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의 글은 위트를 타고 삶의 미시(微視)와 거시(巨視) 사이를 활강한다. 뱃살을 "상반신과 하반신에 걸쳐 있는 무책임한 비무장지대"로 규정하면서 정치적 다양성에 무감해진 한국 현실에 빗댄다. "식사의 끝은 디저트가 아니라 설거지"라며 과정을 고려하지 않고 결과만 강조하는 한국 사회를 꼬집는다. '생활밀착형 비유'가 배꼽을 자극하다 어느 순간, 우리 사회 곳곳 구정물 고인 웅덩이를 툭 건드린다.

"맛있는 디저트 먹을 시간도 부족한데 재미없는 글을 보면 화가 난다"며 '기승전디저트'를 외치는 김 교수를 브라우니가 맛있다는 서울 신수동의 작은 카페에서 만났다.

―팬이 많습니다. 지난해 반짝 떴다 해서 '칼럼계의 김태리'라는 별명도 생겼고요.

"다 출판사 간계(奸計)입니다(웃음)."

―"교수가 쓴 책이라 해서 재미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재미있다"는 리뷰가 많더군요. 사람들이 '교수 글'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보여주는 반응 같습니다.

"개탄할 일입니다. 교수들조차 필요한 글쓰기 트레이닝을 못 받아서 그런 것 아닌가 싶고요."

―책 주제가 방대합니다.

"내용보다는 형식을 시험하고 싶었습니다. 한국 에세이는 크게 굉장히 교훈적인 에세이, 심란한 정서를 파고드는 에세이 두 종류로 나뉩니다. 재미가 없습니다. 유쾌하면서도 심각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했습니다."

―'김영민표 에세이'가 지향하는 형식이 있다면요.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가 '내 영화를 본 사람들은 1층으로 들어갔다가 2층으로 나오길 바란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좋은 스토리엔 '아이러니'가 있어야 합니다. 직선적이거나 서두에서 결말이 예측되는 글은 재미가 없습니다. 논문, 기사 같은 글은 예외지만요."

―'재미'라는 단어를 반복하는군요. 김영민 글의 핵심도 유머 같은데요.

"저한테 유머는 몸에 밴 거라…. 직업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태도 같습니다. 학창 시절 지루한 수업 들으면서 너무 괴로웠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 고통을 학생들에게는 주지 말아야지 합니다."

―우리 사회에 유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나요?

"네, 많이. 특히 사장, 총장, 학장처럼 스피치(연설)하는 위치에 있는 리더들의 유머 감각 부재는 문제입니다. 유머는 청자(聽者)한테 하는 서비스입니다. 듣는 사람을 배려한다는 거지요. 청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권력 남용' 아닌가 합니다. 한국 사회엔 피지배층들이 만든 해학의 전통은 있지만 지배층이 발전시켜온 유머의 전통은 매우 약합니다."

―리더들의 스피치가 어떻기에요.

"한국 스피치의 시작은 대개 사죄로 시작합니다. '제대로 준비 못 해서 죄송하다'면서 운을 뗍니다. 그건 입에 발린 미안함이고, 스피치의 질이 낮은 것에 대한 변명입니다. 그냥 멋진 발표를 하면 될 텐데요."

―책을 관통하는 교훈은 결국 '많이 읽고, 쓰고, 논리적으로 생각하자'인 듯합니다.

"사실 대학 교육의 핵심인데 우리 대학 교육에서 잘 안 되는 부분들이지요."

―수업 들은 제자에게 물어봤더니 기말 페이퍼(리포트)에 특별한 원칙이 있다고 하더군요. 첨삭을 원하는 학생에겐 꼼꼼히 해주는데 채점과 무관하게 리라이팅(고쳐 쓰기)해서 다시 제출해야 한다고요.

"교수 생활한 지 20년 가까이 됐는데 나름대로 만든 방식입니다. '참 잘했어요'류 말고 단락마다 꼼꼼하게 합니다. 한국 대학은 학사 일정이 빡빡해 학점 내기도 바쁜 구조입니다. 코멘트를 자세하게 해주기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제 자랑 같아 보이는데 정말 그렇게 하는 교수가 많지 않다고 합니다."

―몇 퍼센트가 고쳐달라고 합니까.

"4분의 1 정도요."

―생각보다 적습니다.

"개인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 글을 다시 쓴다는 게 귀찮으니까요. 대학 생활을 스스로 망칠 자유도 있는 것이니까요(웃음)."

―글쓰기가 왜 중요한가요.

"대학 시절에 명료한 글쓰기를 배워야 합니다. 필력이 돋보이는 문학적인 글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주장을 남에게 공적으로 납득시킬 수 있는 논리적인 글쓰기를 훈련해야 합니다. 이런 기본이 안 돼 있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 글을 못 쓰고 안 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비문 가득한 글은 가건물 같은 한국 사회와도 닮았습니다. 차곡차곡 토대 위에 지은 게 아니라 허겁지겁 쌓아 올려 오점투성이라는 점에서요."

―한국 엘리트의 수준이 낮다고 한 적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한국은 일반 사람들 수준은 높고 엘리트가 낮습니다. 미국 등 선진국은 반대입니다. 사회가 발전하려면 엘리트 수준이 높아지는 게 중요합니다."

―왜 한국 엘리트의 수준이 낮을까요.

"엘리트 교육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최고 대학이라는 서울대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보입니다만.

"책임을 느낍니다. 다만 서울대만의 문제는 아니고 광범위한 사회문제라 생각합니다."

―하버드(박사과정 동아시아 사상사 전공)에서 유학하셨습니다. 교육이 확실히 다르던가요?

"하버드는 강조하지 말아 주시겠어요. 헛바람 들어간 하버드 타령이 너무 많아서요."

―결국 하버드를 선택하지 않았습니까. 앞뒤가 안 맞아 보입니다(웃음).

"몰라서 갔습니다(웃음). 90년대 초중반이라 인터넷도 없어 유학 정보가 부족했어요. 그러니 저처럼 그저 이름 알려진 몇몇 유명 대학으로 가는 사람이 많았어요. 이젠 정보가 많으니 달라져야죠.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미국 대학은 인문 교육에서 글쓰기에 엄청난 자원과 노력을 투입합니다. 미국 대학(브린모어대)에서 가르칠 때도 그랬습니다. 한국 대학은 글쓰기 강좌를 별도로 두는데 이건 전공 교수가 해야 할 일입니다."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는 교수가 적은 건 아닌지요.

"혐의가 있기는 합니다. 교수들의 논문을 보면 비문이 많다는 걸 느낍니다."

―외고를 받아 보면 비문 가득한 글을 보내고선 한 자도 고치지 말라고 하는 교수도 있습니다.

"내용은 그 사람 소관이지만, 비문은 철저히 고침을 당해야 한다고 봅니다."

―고려대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서울대에서 정치외교학부 교수를 하고 있습니다. 타교, 타 전공 출신 서울대 교수는 드문 케이스 아닌가요.

"드문 건 맞습니다. '정보 부족'으로 대학 진학 때 막연히 책을 많이 읽을 줄 알고 철학과를 선택했습니다. 공부하다 보니 현실과의 접점을 중시하는 정치 사상사가 저와 더 맞는 학문 같았고요."

―차별은 없었는지요. 서울대 말고 타 대학에서도 자교 출신 교수가 아니면 묘한 차별이 있다고 하던데요.

"저는 차별 받은 경험이 없어 불평할 처지는 아닙니다. 그런 차별이 있다면 촌스러운 거죠."

―대중 매체에 칼럼을 쓰니 어떻던가요.

"사람들이 글을 읽을 때 이미 가진 프레임을 통해 보려고 하더군요. 자기가 받아들이고 싶은 대로 전유(專有·appropriation)하는 거죠. 사람들이 어떤 프레임에 익숙한지 정보를 얻게 돼 연구에 도움이 됩니다."

―'뱃살, 설거지, 디저트'가 3종 세트처럼 회자됩니다. 소소한 일상에서 건져 올린 비유가 글맛을 돋웁니다.

"옷처럼 글도 '디테일'과 '마무리'에서 질이 판가름난다고 봅니다. 어디까지 관찰해 디테일을 살렸는지, 얼마나 완결성을 가졌는지 신경 쓰는 편입니다."

―탐서가(耽書家)인가요?

"중·고등학교 때 입시 공부 소홀히 한 것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시간에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 영향이 큰데 그때 리영희 선생의 책 '우상과 이성'을 권하셨습니다. 선생님이 운동권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웃음)."

―교수님도 대학 시절 운동권이었습니까?

"전혀요. 제가 빨갱이면 진짜 빨갱이들한테 미안하죠(웃음)."

―복잡다단한 세상을 단순화함으로써 모순이 생긴다고 지적했지요?

"단순화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공부하는 사람은 최대한 복잡성에 직면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일제강점기를 예로 들어봅시다. 하루 24시간 친일하기는 어렵습니다. 친일 안 하는 순간도 있겠지요. 친일파 몰린 사람 중 독립운동 자금 댄 사람도 있습니다. 양쪽으로 보험 든 것일 수도 있겠지만요. 마찬가지로 항일운동도 24시간 내내 하기는 어려워요. 화장실에선 항일운동이 끊기겠죠. 지적 탐구의 대상으로 연구하는 거라면 이런 다층적인 면을 봐야 모순을 줄일 수 있습니다."

―책 읽기가 왜 중요한가요.

"책은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합니다. 좋은 질문은 좋은 답을 이끕니다. 또 책은 경청을 요구합니다. TV나 영화는 경청 안 해도 볼 수가 있지만 책은 경청 안 하면 읽을 수가 없습니다. 집중력을 강제하지요."

―잘 읽는 비법이 있다면요.

"책 마지막 장 빈 페이지에 내용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나만의 인덱스를 만듭니다. 이렇게 읽다 보면 책도 내게 읽히는 게 분명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가끔 듭니다."

―수업이 칼럼 스타일과 똑같다고 하더군요.

"영화를 수업 교재로 활용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코엔 형제의 미국 갱 영화 '밀러스 크로싱'에 노자 사상을, 히어로 영화 '다크 나이트'와 조선시대 신분제를 연결하는 식입니다."

―1997년 한 일간지 신춘문예 영화평론에 당선했지요? 필명이 '김연'이던데요.

"부끄러운 이름입니다. 이유는 묻지 말아주세요(웃음). 시상식 때 다른 부문 심사를 맡았던 박완서 선생님이 '당신 글이 제일 좋았어요'라고 분에 넘치는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이후 연극 잡지에서 박 선생님이 추천하셨다면서 원고를 청탁한 적도 있었어요. 게을러터져 살아계실 때 찾아뵙진 못했지만 정말 감사한 분입니다."

―'동창회보다 디저트를 좋아한다'라는 식의 '개취(개인 취향) 코드'에 열광한 젊은 독자가 적잖습니다. 그래도 한국 사회에선 '남자가 쩨쩨하게 디저트가 뭐냐'라는 반응부터 나올 것 같은데요.

"이젠 노하우가 생겼습니다. '소주 먹으러 가자' 할 때 '디저트가 낫지 않으냐'고 막연하게 얘기하는 게 아니라 '편의점 가서 요플레 먹자'고 하면 대부분 대화가 정리됩니다(웃음). 모든 술자리가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우르르 몰려서 반지하에서 술 퍼먹는 분위기를 안 좋아하는 겁니다. 제 나이 또래 중년 남성들이 하는 걸 잘 안 합니다. 술, 동창회, 골프…. 그래서 미술 전시 관람처럼 그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할 여유가 생기는 건지도요."

―중년 남성들이 들으면 기분이 상할 것도 같습니다.

"현재 한국의 중년 남성들은 청년기에 시작한 직장 생활로부터 나와야 하는데 잔여 수명은 많이 남아 있는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새로운 적응을 위해 필요한 스트레칭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지요. '중년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질 때가 됐다고 봅니다."

―디저트를 진짜 좋아하는가요.

"길에서 제가 분노하고 있으면 사회적 이슈보다는 디저트가 맛없어서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왜 디저트 따위에 분노하는가' 싶기도 합니다.

"디저트는 음식의 꽃다발 같은 존재입니다. 허기를 채우기 위한 게 아니라 소소한 '사치' '허영'의 영역입니다. 쓸데없는 걸 수도 있는데 이런 서비스에 기꺼이 자원을 투자하겠다는 마음이 깃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배반당할 때 분노가 더 커집니다."

―사회에 디저트 같은 존재가 있을까요.

"당장 써먹기 위한 것이 아닌 배움이나 독서도 같은 맥락입니다. 디저트가 '입맛의 사치'라면 이것들은 '정신의 사치'이죠. 우리 사회가 디저트 같은 삶의 추가적인 서비스에 눈 돌리는 풍요로운 사회가 됐으면 합니다."

디저트란 세 글자를 뱉을 때마다 냉철하던 김 교수가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주변에서 배우 전도연을 닮았다고 한다'는 그의 허무맹랑한 주장이 조금, 아주 조금 설득력 있어 보였다.
조선일보 B3면
베르나르 뷔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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