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기부' 대신 '좌절'을 北에 줘야 진짜 평화 온다

양욱 한국국방포럼 WMD대응센터장
입력 2018.12.29 03:09

北에 군사적 양보하고 남침 억제력 줄줄이 해체해 '기부王' 풍자까지 나돌아
'적장의 말' 그대로 믿고 위협 망각하면 패망할 것… 敵 압도하는 국방력 이뤄야

양욱 한국국방포럼 WMD대응센터장

이달 초순 전국 100여개 대학에 나붙은 '문재인 왕(王)시리즈' 대자보는 문재인 대통령의 주요 정책을 반어법으로 풍자했다. 이 대자보는 현 정부의 안보 정책을 '한·미 연합 훈련 중단, 비핵화 없이 제재 완화를 추진해 나라를 북한에 기부'하는 '기부왕 문재인'으로 묘사했다. 촌철살인의 이 표현에 표류하는 대한민국 국방의 현주소가 압축돼 있다.

2018년은 우리 군(軍)에 시련의 한 해였다. 국방 개혁에 의한 병력 감축에다 기무사 계엄 문건 논란 같은 정치적 소용돌이가 겹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과거사 청산이라는 이름 아래 국방부는 사상 처음 5·18과 관련해 두 명의 장관이 각각 사과했고, 해방 정국의 좌익 폭동이었던 여순 반란 사건에 대해 송영무 장관이 유감을 표명했다. 검찰의 계엄 문건 수사 과정에서 전(前) 기무사령관이 자살하는 일도 벌어졌다.

북한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양보의 연속이었다. 4·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후 우리 군은 일방적인 군비 통제를 시작했고 여름부터는 대한민국 방위 태세를 확인하고 미국의 동맹국 방어 의지를 과시하는 한·미 연합 훈련마저 중단했다. 9·19 평양 선언 이후에는 무력 충돌 방지라는 명목하에 비행금지구역을 확장해 우리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공군력의 운용까지 북한에 양보했다. 전방 감시를 위한 GP 철수도 북한이 2배 이상 많은데도 같은 수를 철거하기로 해 더 큰 양보를 했다. 국방부가 다음 달 발간할 '2018 국방백서'에서 북한 정권과 군에 대한 '주적(主敵)' 표현을 삭제하고, 독재자 김정은 미화(美化) 분위기까지 생기면서 일선 장병들조차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이러한 양보와 치욕 속에서 우리 국방은 국방 개혁과 전시작전권(전작권) 전환이라는 큰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인구 감소에 따른 병력 약화에 대응해 첨단 전력을 구축하겠다는 국방 개혁은 추진된 지 올해로 12년째이지만, 이제 겨우 워리어플랫폼(전투원이 휴대하는 피복과 장구류, 장비 등)에서 성과를 내기 시작했을 뿐이다. 현 정부가 임기 내 실현을 호언하는 전작권 전환의 경우 적의 움직임 파악에 필수적인 전략적 정보 감시 정찰(ISR) 능력과 독자적 전시 군수 지원 능력, 첨단 지휘 통신 체계가 우리에게 전무(全無)하다. 한·미연합사령관을 한국군 장성이 맡는다는 '감투'를 제외하면 알맹이가 없는 게 현실이다.

전쟁은 통상 공격자가 방어자보다 3배 이상의 전력을 준비해야 하는 법이다. 현재 북한군 병력은 128만 명이지만 우리 군은 50만명으로 줄여야만 하는 상황이다. 2022년이 되면 북한 육군 110만여명에 한국 육군 38만여명으로 3대1의 병력 격차가 생긴다. 이런 와중에 우리 군은 북한군의 남침을 막는 대(對)전차 방어벽과 기계화보병사단들을 줄줄이 해체하고 부족한 병력을 보완하는 기동 전력은 약화시키고 있다. 실제로 기동군단의 추가 창설이 좌절됐고 적의 중심을 흔드는 특임여단 예산이 삭감됐다. 또 미군의 지원 없이 독자적 타격을 위해 필요 불가결한 전자전기(電子戰機)는 도입조차 못 했고 대규모 공수 작전을 위한 대형 수송기도 오리무중이다.

새해 우리 안보 환경은 더욱 어려울 것이다. 답보된 남북 대화가 갑자기 진전돼 당장에라도 김정은이 서울에 올 수도 있다. 심지어 그 자리에서 김정은의 '입'으로 비핵화를 약속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장(敵將)의 말을 그대로 믿는 어리석은 지휘관은 패배한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오사카 전투에서 화친(和親)을 청하는 적장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말을 믿고 해자(垓子)와 건축물을 스스로 거둔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던가.

평화 협상은 전쟁 중에도 가능하지만 적의 위협은 한시라도 망각해선 안 된다. 최근 국방부가 독립군에서 우리 군의 뿌리를 찾겠다며 관념적 반일(反日) 프레임 형성에 열심이면서 정작 '실존하는 위협'인 북한에 대한 경계심을 무너뜨리는 것은 심각한 위험 신호다. 모두가 평화를 얘기해도 전쟁을 준비하여 전쟁을 막는 것이 군대의 존재 이유이다. 하물며 국방부는 방어 태세를 낮추는 게 아니라 높이는 게 주된 임무이다. 전쟁은 이겨 놓고 싸우는 것이다. 이길지도, 질지도 모르는 능력으로는 전쟁을 막지도 못하고, 전쟁이 발발해도 승리할 수 없다. 그래서 2019년 대한민국 국방은 적(敵)에게 '좌절'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적을 압도하는 능력 실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럴 때 한반도에 진짜 평화가 올 것이다.



조선일보 A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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