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사회] 피의사실 중계방송하는 검찰

최원규 사회부 차장
입력 2018.12.14 03:14

검찰, '재판 거래' 의혹 수사하며 법원 압박 위해 혐의내용 흘리고 압수영장 기각 사실까지 공개
"경찰 인권 침해" 말할 자격 있나

최원규 사회부 차장
꽤 오랜 기간 검찰의 여러 수사를 지켜봤지만 최근의 법원 수사처럼 하는 것은 처음 봤다. 큰 수사가 시작되면 기자들은 으레 수사 내용을 취재하려 눈에 불을 켜고, 검찰은 철통 보안에 나선다. 그게 보통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번 수사는 중계방송하듯 이뤄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사, 방송사, 인터넷 매체까지 저마다 '단독 보도'를 쏟아냈다.

어느 정도였는지 언뜻 감(感)이 안 잡히면 지난달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공소장이 언론에 공개됐을 때를 떠올리면 된다. 검찰은 그를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실무 총책임자라고 했다. 그의 범죄 사실만 100여 개이고 공소장은 243쪽에 달한다. 이쯤 되면 보도할 내용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막상 기자들 사이에선 "더 쓸 게 없다"는 말이 나왔다. 수사 도중 피의사실이 거의 다 언론에 흘러나갔기 때문이다.

그중엔 기자들이 열심히 취재해 쓴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론사들마다 그렇게 돌아가면서 골고루 단독 보도를 쏟아낸 것을 취재 경쟁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같은 날 방송사 두 곳이 저녁 뉴스에서 거의 똑같은 내용을 단독 보도라며 방송하는 것도 봤다. 이걸 우연이라고 할 수 있나. 검찰이 노골적으로 흘린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형법은 기소 전 피의사실 공표를 금지하고 있다. 검찰엔 오보 방지 등 제한된 이유가 아니면 수사 상황 공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수사 공보(公報) 준칙도 있다. 과거 검찰도 피의사실을 흘렸지만 그런 법과 기준을 의식해 일정 선은 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젠 아예 의식조차 하지 않는 듯하다.

그 사이 이른바 '재판 거래' 의혹은 확인도 안 됐는데 기정사실처럼 돼 버렸다. 전직 대법관, 대법원장이 그 주범으로 지목됐다. 검찰 안팎에선 "검찰이 그걸 노리고 피의사실을 흘렸다"는 말도 나온다. 여론을 등에 업고 영장 발부에 소극적인 법원을 압박하려 했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저열한 것이다.

검찰은 수사 초반엔 법원의 압수수색 영장 기각 사실까지 문자 메시지를 통해 기자들에게 실시간으로 알렸다. 압수수색 영장은 기밀 유지가 중요하다. 그런데도 "법원이 '제 식구 감싸기'를 하고 있다"는 비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영장 기각 사실을 공개했다.

지난 4월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 때 경찰이 김경수 경남지사에 대해 신청한 압수수색 영장을 검찰이 기각하자 그 사실을 공개한 적이 있다. 경찰이 부실 수사로 코너에 몰렸을 때였다. 경찰은 "이제 제대로 해보려는데 검찰이 막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격분한 검찰 간부들은 "어떻게 그걸 공개하느냐. 기본이 안 돼 있다"고 했다. "공무상 기밀 누설"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그래 놓고 몇 달 뒤 똑같은 일을 했다. 내로남불도 이 정도면 중증(重症)이다.

수사팀에선 "법원을 수사하다 보니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 수사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전직 법관들의 잘못이 있다면 그것을 처벌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편법과 꼼수를 동원하는 건 분명 정도(正道)가 아니다.

검찰의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를 방해했다는 혐의로 수사를 받던 변창훈 검사가 투신해 숨진 게 작년 11월이다. 그는 "검찰이 사실과 다른 얘기를 흘리면서 나를 몰아가고 있다"고 억울해했다고 한다. 그런 일을 겪고도 검찰은 달라진 게 없다.

검찰의 경찰 수사 지휘권을 없애겠다는 정부의 수사권 조정안에 검찰은 반대하고 있다. "경찰의 인권 침해를 막을 장치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지금 검찰이 그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조선일보 A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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