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熱水파이프' 낡은 것만 686㎞

고양=조철오 기자 고양=정우영 기자 고양=김은경 기자
입력 2018.12.06 03:01 수정 2018.12.06 06:39

1기 신도시·서울 반포·여의도, 20년 이상 된 노후 난방관 집중
5년 동안 파열 사고 12건 발생… 정부, 백석역 터지자 "긴급 점검"

지난 4일 밤 경기 고양시 지하철 백석역 인근 도로와 상가에 섭씨 100도가 넘는 물을 뿜어낸 열수(熱水)관 파열 사고는 묻은 지 27년 된 열수관 관리 부실 때문으로 나타났다. 일산동부경찰서는 5일 "열수관에서 지름 50㎝ 크기의 구멍이 발견됐다"고 했다. 지하 2m에 설치된 관이 터지면서 지반이 무너지고 물기둥이 15m 높이로 솟구쳐 올랐다. 또 뜨거운 물에 데어 1명이 숨지고 40명이 다쳤다.

숨진 송모(69)씨는 승용차를 몰고 가던 중 화를 당했다. 구두 수선공인 송씨는 내년 4월 결혼하는 둘째 딸, 예비 사위와 저녁을 먹고 혼자 귀가하는 길이었다. 차량 블랙박스 영상에 따르면 차 앞에서 수증기가 밀려오자 송씨가 차를 멈췄고 이후 무엇인가에 맞은 듯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경찰은 "물대포처럼 고압 분사된 물줄기가 차 유리를 깨고 송씨에게 쏟아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27년 된 노후 난방관 - 5일 오전 경기 고양시 지하철 백석역 인근 도로에서 작업자들이 전날 파열됐던 열수관을 복구하고 있다. 100도가 넘는 난방용수가 흐르는 관이 터지면서 물줄기가 지면을 뚫고 15m 높이로 치솟았다. 경찰은 매설한 지 27년 된 열수관이 노후화돼 사고가 난 것으로 보고 있다. /연합뉴스
사고가 난 열수관(지름 1m)은 1991년 일산 신도시에 난방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됐다. 사고 지점에서 1㎞ 떨어진 한국지역난방공사 대형 보일러에서 가열한 물을 주변 아파트로 보낸다. 열수관 내구연한은 통상 40년이다. 박수완 부산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주변 지질에 따라 실제 사용 가능 기간은 이보다 짧을 수 있다"고 했다. 사고 열수관은 지난 10월 지역난방공사 위험 평가에서 가장 위험한 '1등급'을 받았다. 사용 가능 연한이 1년 이하라는 뜻이다.

열수관은 전국에 2164㎞ 길이로 매설돼 있다. 이 중 20년 이상 된 관이 686㎞(전체의 32%)다. 일산과 분당 등 1기 신도시, 서울 이촌동·반포·여의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최근 5년간 발생한 열수관 파열 사고 12건 중 8건이 일산과 분당에서 발생했다. 모두 20년 이상 된 노후관에서 일어났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이날 "1998년 이전 설치된 열수관에 대한 긴급 점검을 하겠다"고 밝혔다.

열수관 사고에서 물줄기가 지표를 뚫고 솟구치는 것은 이례적이다. 열수관이 파열되면 1.3㎞마다 설치된 밸브가 차단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고 발생 1시간30여 분이 지나서야 밸브가 완전히 차단됐다.

사고를 목격한 시민들은 "흰 수증기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아 처음에는 불이 난 줄 알았다"고 했다. 인근에서 주차 관리를 하고 있던 정택용(67)씨는 "갑자기 '뻥' 하는 소리가 나더니 길 건너편에서 물이 발목 깊이 정도로 밀려들었다"고 말했다. 식당 직원 김모(56)씨는 "수증기가 건물 안으로 밀려들어 1m 앞도 보이지 않았다"며 "무조건 위로 올라가야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계단을 손으로 더듬으며 기어올랐다"고 말했다. 지반이 무너지면서 백석역 일대 왕복 4차로 도로 일부가 파손되고 인근 아파트 4개 단지 2861가구의 난방과 온수 공급이 중단됐다가 5일 오전 9시쯤 임시 복구됐다.

‘100℃ 물대포’에 깨진 차 유리창 - 4일 오후 경기 고양시 백석역 인근 도로 열수관이 터지는 사고로 숨진 송모씨 시신을 소방대원들이 수습하고 있다. 이날 사고 지점을 지나던 송씨는 지하 관(管)에서 솟구친 뜨거운 물줄기에 맞아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허술한 노후관 안전 점검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열수관은 최대 40년 동안 쓸 수 있지만 습도나 토질 등에 따라 사용 기간이 줄어들 수 있다.

한강 하류인 일산의 경우 지하수 수위가 높아 지반 변형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도 있다.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김정구 교수는 "수분 함유량이 높은 토양이나 염분이 높은 곳의 경우 관 부식 속도가 빠르다"며 "주변 토질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열수관을 관리하는 한국지역난방공사는 주기적으로 육안으로 지반 침하 여부를 확인하고, 연 2회 열화상 카메라로 누수 여부를 검사한다. 전문가들은 "관이 오래되면 내부의 철 성분이 녹아 2~3㎝의 쇠 찌꺼기가 쌓이기 때문에 5~7년 단위로 미세 로봇을 투입해 불순물을 긁어내야 한다"며 "현재는 비용 부담이 커 도입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열수관 사고는 올 들어서만 여섯 번째다. 한국지역난방공사 열수관 사고가 4건, 다른 에너지 기업이 관리하는 열수관 사고가 2건이었다.

피해는 열수관 연식이 오래된 1기 신도시에 집중되고 있다. 성남시 분당은 올해 두 번 열수관이 파열됐다. 지난 2월엔 서현동 AK플라자백화점 인근 도로에 매설된 열수관이 터져 백화점 난방이 일시적으로 끊겼고, 3월엔 분당 이매동 방아다리 사거리 부근에서 도로 아래 열수관이 파손돼 인근 2492가구의 난방이 중단됐다. 정상만 공주대 건설환경공학부 교수는 "1990년대 초 짧은 기간에 몇 십만호가 이용할 시설을 만들다 보니 열수관 등 기반 시설 설계, 공사 과정에서 부주의했던 부분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앞서 한국지역난방공사는 지난 9월 감사원 감사에서 엉성한 열수관 위험 등급 산정 기준을 개선하라는 통보 조치를 받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열수관이 묻힌 곳과 없는 곳의 지열(地熱) 차가 클 경우 위험한 관으로 볼 수 있는데, 조사와 관리가 뒤죽박죽이었던 것이다. 감사원이 한국지역난방공사 A지사가 관할하는 열수관 147개를 확인한 결과 지열 차가 5도 이상인 위험관은 29개였으나 이 중 1곳만 위험관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반면 지열 차가 74.9도나 되는 열수관은 위험하지 않은 '등급 외'로 분류해 방치했다. 또 열수관의 위험도를 계산할 때 적용하는 변수는 계절에 따라 달라야 하는데 아무 기준 없이 일률적으로 적용해 등급의 정확도를 떨어뜨렸다는 지적도 받았다.

전문가들은 "사용 기한이 다하지 않았더라도 열수관 내부에 이물질이 쌓여 관이 좁아지고 수압이 높아지거나 보수 과정에서 관에 충격을 주면 파열 사고가 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사고는 사전 징후도 없다는 것이다. 녹슬기 쉬운 연결 부분에 '커플링'이라는 보호 장치를 덧대 파열 가능성을 줄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지역난방공사는 "노후화된 열수관의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작년 12월 2년짜리 외부 용역을 맡겨놓은 상태"라며 "그 결과를 근거로 열수관 교체 중·장기 계획을 세울 예정"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A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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