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건설적 반대賞

김기철 논설위원
입력 2018.12.06 03:16

유태계 화가 샤갈이 1941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나치 협력자들에게 체포됐다. 수용소로 끌려가기 직전 미국 영사 하이램 빙엄이 구해냈다. 빙엄이 프랑스 지하 조직과 손잡고 탈출시킨 유태인과 반(反)나치 활동가는 2500명이 넘는다. 당시 워싱턴 정부는 프랑스 비시 정부와 우호 관계를 원했고, 빙엄에게 유태인 난민을 돕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걸 거스른 빙엄은 좌천됐고 승진에서 탈락해 사표를 냈다.

▶빙엄은 2002년 파월 국무장관이 주는 '건설적 반대상'(Constructive Dissent Awards)을 받았다. 정부와 다른 소신을 펼쳤더라도 결과적으로 미국 외교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끈 외교관에게 주는 상이다. 빙엄은 사후(死後) 수상이었다. '건설적 반대상'은 미국외교관협회(AFSA)가 주관한다. 미국 현직 외교관 80%가 가입한 이 단체는 50년 가까이 상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 '건설적 반대상'은 주한 미 대사관 상무과에서 근무한 엘레나 오거스틴이 받았다. 한·미 FTA 폐기까지 거론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고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보고서를 써서 협정을 원만하게 개정하도록 기여한 공로다. 미국 외교관 협회지는 경복궁 경회루 앞에서 한복 차림을 한 오거스틴 사진과 함께 수상 소식을 전했다. 한국어도 곧잘 하는 오거스틴은 지난 7월 워싱턴으로 귀임했다.

▶한국에서 건설적 반대를 하면 어떻게 될까. 2009년 김영수 해군 소령은 9억원대 군납 비리를 폭로했다가 내부 고발자로 찍혔다. 군 간부들을 포함, 서른한 명이 사법 처리됐지만 그는 2년 만에 쫓겨나다시피 전역했다. 박근혜 정부 때 노태강 문체부 체육국장도 승마협회를 감사하면서 최순실 측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고서를 썼다가 좌천당하고 몇 년간 쓰라린 세월을 보내야했다.

▶미국에서도 대통령에게 입바른 소리를 한 사람들이 쫓겨나거나 고초를 겪은 경우는 적지 않다. 하지만 한국 같지는 않다. 한국에선 압수 수색 영장을 들고 온 검사를 만날 각오까지 해야 한다. "세금을 쏟아부어 일자리를 만드는 건 임시방편에 불과하다"고 한 경총 부회장은 쫓겨난 뒤 업무비 횡령 혐의로 수사받고 있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에 반발해 거리로 나왔던 소상공인연합회도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조용해졌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비위 의혹에 대해 조국 수석 책임론을 얘기한 여당 의원은 비난 댓글 폭탄을 맞고 있다. 만약 시민단체 하나가 '건설적 반대상'을 만들어 시상하면 수상자는 울상을 지을 것 같다.


조선일보 A3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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