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사물극장] [75] 앤디 워홀의 '테이프 레코더'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입력 2018.12.06 03:09

그는 일요일을 싫어했다. 꽃 가게와 서점 외에는 가게들이 다 문을 닫기 때문이다. 잡지의 향수 광고에 흥분하고, 속옷 쇼핑을 즐기며, 화려한 가발을 자주 썼다. 침실의 텔레비전 넉 대는 종일 켜진 상태였다. 6시간 이상 잠자는 사람을 찍어 영화 한 편을 제작했다. 패션 잡지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다 실크 스크린으로 오브제를 복제하는 '팝아트'의 창시자로 변신했다.

체코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앤디 워홀(1928~1987)은 예술 활동과 파티를 즐기며 비즈니스 아티스트의 선구자로 살았다. 어려서 류머티즘에 걸려 병상에서 지냈는데, 이것이 심리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인형이나 공작품을 갖고 놀며, 종일 라디오를 듣고 영화배우 사진을 모았다. 페인팅과 드로잉에 재주를 보여 피츠버그에 있는 카네기멜론대학교 공대에서 상업 미술을 전공했다.

1960년대 미국에는 번영이 지속되리라는 낙관주의가 널리 퍼졌다. 중산층은 새 가전제품을 사들이고, 소비는 미덕으로 칭송되었다. 히피와 우드스톡, 그리고 반전(反戰)과 평화의 노래가 대유행이었다. 이 무렵 앤디 워홀은 달러·맥도널드 햄버거·코카콜라·수프 통조림 같은 사물들과, 괴테·체 게바라·케네디·메릴린 먼로 등의 초상을 다양하게 복제하는 그림으로 유명해졌다.

그가 처음 테이프 레코더를 산 것은 1964년이다. 한동안 그것을 끼고 살았다. "내 아내인 테이프 레코더와 나는 10년 동안 결혼 생활을 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그는 지인들과의 대화와 혼잣말을 녹음하고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그는 화가로서의 평가는 엇갈렸지만 돈과 명성을 거머쥔 '팝아트'의 황제이자 전위 영화 제작자로,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며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그는 인간의 태어남에 자기 의지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뜻으로 "태어나는 것은 납치되는 것과 같다"라는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조선일보 A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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