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평화 깃들길" 동방 정교회의 축복

이해인 기자
입력 2018.12.05 03:01

한국에 온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호그와트 마법학교 덤블도어 교장처럼 지팡이를 든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동방 정교회 바르톨로메오스(78) 세계총대주교다. 가톨릭교에 교황이 있다면 동방 정교회에는 세계총대주교가 있다. 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아현동 성 니콜라스 대성당에 들어선 그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신자인 열세 살 소년 로만이 수줍게 다가서자 손등에 키스를 건네더니 주머니에서 분홍색 십자가를 꺼내 손에 쥐여줬다. 로만은 "이 십자가는 평생 간직할 것"이라며 감동해 울먹였다.

4일 서울 마포구 성 니콜라스 대성당을 방문한 바르톨로메오스 세계총대주교. 동방정교회 세계총대주교는 가톨릭으로 치면 교황의 지위에 해당한다. /남강호 기자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이며 동방 정교회 수장인 바르톨로메오스 세계총대주교가 한국을 찾았다. 1968년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서울 주교좌성당 건축 50주년을 맞아 성찬예배(5일)를 집전하기 위해서다. 터키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난 바르톨로메오스 1세는 1969년 정교회 사제가 된 후 1991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총대주교 겸 세계총대주교로 선출됐다. 한국 방문은 1995년 이후 네 번째. 그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 이뤄지기를 항상 기도하고 있다"며 "7일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통일을 위한 노력에 대한 감사와 격려의 말씀을 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최근 동방 정교회는 다시 한 번 대분열의 위기를 맞고 있다. 2014년 크림반도 사태 이후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독립을 요구한 것이 발단.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이 지난 10월 우크라이나 정교회 독립을 인정하자 3억명의 동방 정교회 신자 중 1억명 이상 신자를 가진 러시아 정교회가 지난달 콘스탄티노플과 관계 단절을 선언했다. 1054년 로마 가톨릭과 갈라선 이후 두 번째 분열 위기다. 바르톨로메오스 대주교는 "알바니아, 불가리아, 루마니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고 그때마다 세계총대주교는 각각 독립교회로 인정했다. 세(勢) 약화를 우려한 러시아 교회가 이를 막는 것"이라고 꼬집은 뒤 "독립교회를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세계총대주교만의 고유한 권한"이라고 했다.

하지만 종교 간 화해와 평화를 위한 노력도 잊지 않았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프란치스코 교황과는 여덟 차례 만났을 정도로 교류가 많다. 교황은 인간적으로도 겸손하고 사랑이 많은 분"이라며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줄 수도 있다"고 웃었다. 이어 "교황과는 환경 보전이라는 같은 관심사를 갖고 있어 다양한 활동을 같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바르톨로메오스 세계총대주교는 환경운동가로도 유명해 '녹색 총대주교(Green Patriarch)'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7일에는 서울 홍은동 그랜드 힐튼 호텔에서 '정교회 전통에서 본 생태학, 신학, 그리고 인간 존엄성'이라는 주제의 환경문제 심포지엄에 참석한다. 그는 "최근 한국에서도 재활용 문제에 신경을 쓰는 등 환경을 위해 많은 관심을 갖고 노력하는 것으로 들었다. 감사드리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성탄 메시지도 전했다. "모든 생이 여러분들이 원하는 대로, 계획한 대로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갓 블레스 유!"


조선일보 A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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