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바로 드레스의 제왕"

도쿄=최보윤 기자
입력 2018.12.04 03:00

발렌티노 총괄 디자이너 피엘파올로 피치올리

패션계에 '왕좌의 게임'이 있다면 드레스 분야의 독보적인 승자는 발렌티노(Valentino)일 것이다. 1995년 결혼한 그리스의 마리샹탈 밀러 왕세자빈, 2002년엔 네덜란드 막시마 왕비, 2013년 식을 올린 스웨덴 매들린 공주…. 현존하는 유럽 왕실의 웨딩 드레스 상당수가 바로 이탈리아 브랜드 발렌티노 의상이다. 재클린 케네디가 오나시스와 재혼할 때 입은 결혼식 드레스 역시 발렌티노. 21세기 최고의 쿠튀리에(couturier·최고급 맞춤 의상 디자이너)로 불리는 디자이너 발렌티노 가라바니(86)가 한 땀 한 땀 완성한 작품이다.

최근 일본 도쿄에서 열린 '2019 발렌티노 프리폴(pre-fall) 컬렉션' 현장에서 만난 발렌티노 총괄 디자이너 피엘파올로 피치올리(50·작은 사진)는 10년 전 전격 은퇴한 발렌티노를 10년 만에 부활시킨 후계자로 꼽힌다. 펜디에 이어 1999년 발렌티노 액세서리 디자이너로 일하게 되면서 발렌티노의 눈에 띄었다. 발렌티노의 은퇴 뒤 브랜드 디자이너 자리에 올라 2016년부터 남녀 컬렉션 모두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모든 이가 창의성을 말하지만 전 참을성도 필요한 자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발렌티노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세계적 거장이 되는 이들에겐 남다른 미학적 감각뿐만 아니라 꾸준히 일하고 포기하지 않는 성격도 갖추고 있다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죠."

수퍼모델 신디 크로퍼드의 딸이자 최근 유명 런웨이를 석권한 모델 카이아 거버가 최근 도쿄에서 열린 ‘발렌티노 2019 프리폴 컬렉션’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붉은 드레스에 촘촘한 러플을 달아 풍성한 화려함을 과시했다. /발렌티노
극도의 화려함을 추구하는 브랜드의 디자이너이지만 그의 의상엔 장식 하나 없었다. 검은 면바지에 검은 셔츠, 흰색 발렌티노 운동화가 전부. 패션계 남성 디자이너로는 드문 '스트레이트(이성애자)'이기도 한 그가 슬리퍼를 신고 단출한 의상을 선택했다는 첫 출근 장면이 그려졌다. '쿠튀르 하우스'의 대명사인 발렌티노에 길거리 패션 감성을 주입해 젊은 층의 큰 호응을 끌어낸 것도 그의 자유분방한 스타일이 더해져서다. 하나의 스타일로 자신을 규정짓는 걸 경계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있으면서도 영국의 펑크록 스타일도 사랑합니다." 그룹 '퀸'의 의상을 제작한 잔드라 로즈에게 자문한 적도 있다.

그는 요즘 동양의 '와비사비(わびさび)'에 푹 빠져 있다고 말했다. 일본어 '와비(侘)'는 세속적 삶에서 벗어나 단순하고 덜 완벽하며 본질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 '사비(寂)'는 낡았지만 한적한 삶에서 정취를 느끼는 미의식이다. "서양에서는 언제나 빈틈없이 완벽할 것, 꽉 차 있고 대칭적이며 숨 막히게 아름다울 것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와비사비가 강조하는 불완전함이 주는 우아함과 여백의 여유는 심호흡을 고르고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철학적 공간을 마련하지요." 그가 선보인 의상은 화려한 주름과 레이스, 과장된 실루엣 등 전통적인 발렌티노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군화풍의 신발을 신는다든지, 어딘가 좌우가 불균형해 보이는 재단을 시도한 흔적이 엿보였다.

동양적 미학에 푹 빠졌다는 그는 한국도 '버킷리스트'에 들어 있다고 말했다. "제 베스트프렌드인 가수 미카가 저를 볼 때마다 '넌 한국에 꼭 가야 해. 한국이 세상에서 최고로 좋은 나라야. 넌 곧바로 사랑에 빠질 거야'라고 귀에 박히도록 말했거든요. 머지않아 서울이 주제가 될 것 같습니다!"



조선일보 A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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