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우리는 위당을 '조선의 國寶'라고 하였다"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8.12.01 03:00

[김동길 인물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정인보(1892~?)

일러스트= 이철원
위당 혹은 담원이라는 아호로 널리 알려진 대학자 정인보는 1892년 5월 6일(음력) 서울 회동에서 명문가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경술국치의 해인 1910년 중국 유학 길에 올라 상해에서 동양학을 전공하는 한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박은식·신규식과 함께 조국 광복 운동에 힘을 모았다. 1918년 귀국 후에는 연희전문과 이화여전 그리고 세브란스의학전문과 불교전문에서도 국학과 동양학을 강의하는 한편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도 활약하였다.

내가 위당에 관하여 아는 사실들은 대부분 나의 은사 백낙준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1948년 여름 연희대학의 노천극장에 전교생이 다 모인 자리에서 위당으로부터 국학에 대한 강의를 들은 때였다. 위당의 국사관이 가장 특이한 것은 그가 '얼'이라는 독특한 낱말을 가지고 우리 역사를 풀이하는 점이었다. 그는 그런 강의 중에서도 웃기는 말도 가끔 섞어 모든 학생을 폭소하게도 하였다. 강의는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때 들은 퇴계에 관한 이야기가 지금도 생각난다. 젊은 선비 퇴계가 종로에서 길을 가다가 발을 멈추고 기생들이 여럿 지나가는 것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관기들이 하도 예뻐서 근엄한 유생 퇴계도 넋을 잃고 기생들을 한참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정신이 들어 퇴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이렇게 한마디 하였다. "이 마음이 나를 죽이는구나."

용재 백낙준은 '담원국학산고'의 서문을 쓰면서 '우리는 그를 국보라고 하였다'고 칭송하였으니 알 만하지 않은가! 국학의 진흥을 위해 그는 국학대학을 설립하고 1948년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으나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의 간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초대 감찰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상공부 장관으로 발탁된 임영신이 부적절하다고 대통령에게 직고했으나 대통령이 듣지 않았다. 그래서 위당은 사표를 던지고 그날부터 출근하지 않았다.

일제시대 그의 친구들은 유길준의 아들 유억겸, 연전의 교수 백낙준 그리고 서울 YMCA의 총무 구자옥이었다고 한다. 위당은 해학의 명인이기도 했다. 그들 사이에서는 말로 옮기기 거북한 농담도 오고 갔다는 것이다. 그들이 만나면 위당을 '당나귀'라고 부르며 놀렸다는데 하루는 그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들었다. "나는 길에 가다가 당나귀를 보면 남 같지가 않아." 선비로서는 하기 어려운 농담이지만 위당은 서슴지 않고 그런 우스갯소리도 잘하였다. 언젠가 집의 마당 한구석에 조그마한 정자를 하나 짓고 그 현판에 '위락당(爲樂堂)'이라고 썼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 옥호를 보고 역시 유식한 어른은 다르다고 감탄하였다지만 그 글을 거꾸로 읽으면 '당낙위'(당나귀)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의 아호가 위당이 된 것도 같다.

청빈낙도로 일관한 위당은 아들 딸을 잘 키워 아들 정상모는 광복이 되고 나와 같은 대학에 들어가 나와 같은 반에서 공부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자기가 위당의 아들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어서 전혀 모르고 지냈다가 졸업한 후에야 알았다. 아들 하나는 국립박물관 관장을 지낸 정양모이고, 국문학을 전공한 딸 정양완은 국문학자 강신항의 아내가 되었는데 그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들 하나가 수학의 천재라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역사학자 용재는 조상이 쓰다가 전혀 쓰지 않게 된 낱말들을 되살린 위당을 높이 평가하였다. '얼'이란 낱말뿐 아니라 '가람'이니 '누리'니 하는 옛말들을 우리 생활의 일상용어로 만들어 주었다고 위당을 자랑하였다. 국학을 그토록 중시하던 위당의 정신을 받들어 해방이 되고 연희대학에 국학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일제 말기에 접어들어 창씨개명이니 신사참배니 하는 꼴사나운 일들이 강요되었을 때 위당은 훨훨 털고 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 형편이 되었으니 그의 집안 식구들이 겪은 고생은 말로 다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벽초 홍명희가 월북할 때 그의 둘째 아들 홍기무를 데리고 떠났는데 홍기무는 위당의 둘째 사위였다. 그가 간첩이 되어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어 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6·25가 터지자 출옥하여 장인을 찾아와 큰절하고 협조를 요청했으나 위당은 단호하게 그에게 일러주었다. "너는 유물론자이고 나는 유신론자이다. 어떻게 같이 일을 하겠느냐." 그리고 6·25 동란 와중에 위당은 납북되어 어느 날 어디서 어떻게 운명했는지를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다.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광복절의 노래'는 위당의 작사이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화여대의 교가 또한 그의 작사이다. '한가람 봄바람에/ 피어난 우리/ 성인이 이를 불러/ 이화라셨다/ 거룩한 노래 곱게도 나니/ 황화방 안에/ 천국이예라.' 위당이 세상을 떠난 지 40년 만에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고, 연세대학은 2001년에야 위당 정인보 선생 기념관을 마련하여 국학 진흥에 헌신한 위당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중국의 학자들이 위당의 글을 읽고 모두 감탄하여 '이렇게 훌륭한 학자가 해동(한국)에 있음은 진실로 놀랍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이 땅 어디엔가 잠들어 있을 것이다. 아니다, 그는 오늘도 잠들지 않고 조국의 앞날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는 탁월한 선비이기에 앞서 이순신과 안중근·윤봉길을 흠모하는 위대한 애국자였다.



조선일보 B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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