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자립·자족 정신이 내 재능 뿌리… 나는 자연주의자니까"

안영 기자
입력 2018.12.01 03:00

[아무튼, 마이웨이]

방송인 타일러 라쉬

지하철역 스크린도어에 등장한 타일러 라쉬(30)의 광고 사진이 낯설다. 예능 프로그램 패널로 이름을 알린 이 미국 청년은 지금까지 똑똑한 모범생 캐릭터. 그런데 갑자기 '자연주의 영어'를 외치며 뽀얀 피부에 흰 옷차림으로 등장했다. 오해 금지. 화장품 CF가 아니다. 영어 학습 광고다. 요즘 말로 '1타(1등 스타) 영어 강사'가 됐다. 그뿐인가. 타일러의 직함은 여러 개다. 얼마 전엔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의 책을 번역했고, '티에이블'이라는 소규모 컨설팅회사 대표도 맡고 있다. "중구난방 이력을 꿰는 키워드가 있느냐"는 질문에 천진하게 "자연주의죠"라고 대답한다. 미국 동북부 '깡촌', 버몬트주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란 그는 자연인을 표방한다. "한국에 대도시 출신 미국인은 많잖아요. 저는 버몬트 출신이고 희귀해요. 그 자체로 정체성이 된다고 생각해요."

타일러 라쉬는 시종일관 파란 눈을 반짝거렸다. 좋아하는 일을 좇아 살아온 사람답게 쾌활했다.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운 모습이 곧 정체성이 된다’고 믿는 그에게 획일화된 한국은 ‘도전의 땅’이었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한때 주지사를 꿈꿨다는 이 청년, '정글 북'의 고향이자 '죽은 시인의 사회'의 배경인 버몬트식 인생관을 들려주겠다며 자리를 고쳐 앉는 그에게 '자연주의'를 물었다. 장르를 넘나드는 종횡무진 활약상이 답으로 돌아왔다. 서울 광화문 위워크, 그의 사무실 한쪽에서 주고받은 대화다.

―'자연주의'는 어린 시절의 영향인가?

"어릴 때 가정교육도, 살던 지역의 문화도 자유로웠다. 미 동북부의 특징 중 하나는 '하고 싶은 걸 해라' 주의다. 자연 속에서 자라고, 궁금증을 따라가는 교육을 하게 하고. 그게 교육 정책에 녹아 있다. 특히 내가 살던 버몬트는 촌이라 사람이 별로 없다. 사람이 적어 주립 학교를 못 만드니까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사립학교를 만들고 주 정부에 보조금을 요청해서 학교를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교육과정이 자립·자족이었다."

타일러가 출연한 영어 학습 광고 ‘리얼클래스’ CF 중 한 장면. / 리얼클래스

―'해야 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라는 행복론 강의를 봤다.

"부모님은 항상 좋아하는 걸 하라고 격려해줬다. 부모님이 '뭐 하고 싶어?'라고 물어보면 '이러이러한 것들 몇 가지가 하고 싶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럼 부모님이 '그중에 이게 좋겠다'고 말해준다. '해야 해'라고 강요하고 '왜 해야 해요?'라고 되물으면 '그냥 해' 이런 방식으로 흘러가는 대화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진로 선택도 그런 식?

"그렇다. 그런데 한국에선 '생물공학, 불어불문학을 왜 전공하세요?' 이렇게 물어보면 다들 '붙었으니까요'라고 대답한다. '여기를 다녀야 하니까'라고 대답하는 게 너무 슬프다. 나는 사람마다 하고 싶은 게 있고, 누구에게나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변혁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게 아니더라도, 아주 작은 거라도."

그는 시종일관 '주체적인 삶'을 이야기하며 눈을 반짝였다. 심지 곧고 자존감 넘치는 이 청년에게 짐짓 '무례한' 질문을 던져봤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가끔 타일러씨 외모를 지적하지 않나. 외모가 콤플렉스였던 적은 없었나?" 아랑곳하지 않고 강단 있게 눈을 반짝인다. "나도 안다. 키 작고 머리숱 없는 거. 아주 어렸을 때부터 놀림을 받았으니 모를 수가 있나. 그런데 내 안엔 외모 말고도 보여줄 수 있는 게 많다. 내 삶엔 이렇게 다양한 콘텐츠가 있는데, 좀 더 의미 있는 얘기를 나눌 수 있는데, 왜 자꾸 외모 이야기를 하려는지 종종 의아하다."

한 방 얻어맞은 뒤, 그가 가진 '다양한 콘텐츠'를 물었다.

―영어, 한국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5개 국어에 능통하고 중국어, 일본어, 이탈리아어도 읽고 쓸 줄 안다고 들었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그냥 좋아하는 것에 심각하게 몰두하는 스타일일 뿐. 언어 공부를 좋아하고, 학습 방법에 대해 고민도 많이 해서 남들보다 많이 아는 것뿐이다. 언어를 배운다고 할 때 배우다는 '몸에 배다'란 뜻이다. 그런데 언어를 잘 배우려면 그 한마디 한마디에서 배어 나오는 맥락을 배워야 한다. '언어 공부'라고 하면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체화되도록 판을 짜는 과정이다. 이를테면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여행을 하면서 그 언어에 익숙해져야 한다. 사전은 절대 없어야 한다. 그 단어를 궁리할 필요가 없이 어느 순간 이런 맥락에서 이런 거겠구나 하고 깨달음이 오면 그때가 바로 언어를 습득한 때다."

자연스러운 게 중요하다는 이 청년은 '미국 리버럴 청년'이라는 별명대로 부자연스러운 권위주의에 반발하는 지적 여정을 계속하고 있었다.

―최근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 신간을 번역했다면서.

"작은 출판사가 어쩌다가 매들린 올브라이트 책 '파시즘'의 판권을 얻었다. 내게 번역 요청이 들어왔다. 권위주의가 돌아오고 파시즘의 경향이 고개를 드는 상황에 대한 우려가 주제다. 부자연스럽고 잘못된 방향이지 않나. 한국은 하필 그런 성향의 주변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이 책을 번역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다."

―'파시즘'이란 단어는 좀 세지 않나.

"바로 그거다. 그 단어로 묘사해야 할 만큼 경종을 울릴 필요가 있다. 저자는 본인의 2차 세계대전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책을 시작한다. '그때 그 파시즘'이 최근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며. 파시스트 성향의 리더들에 대해 묘사하는 챕터가 잇달아 나온다. 마두로, 오르반, 히틀러, 무솔리니, 에르도안…. 이렇게 하나하나 다루다가 '김정은'이 나오고 맨 끝에 '트럼프'가 나온다. 의미 있는 번역이었다고 생각한다. 미국인으로서, 그리고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꾸준히 한국 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있다.

"갑자기 영어 표현이 생각나는데, 'rocket fuel'이란 단어가 있다. 갑작스러운 추진력을 얻었다고 해야 하나? 단순히 인지도가 생긴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대학원 다닐 때 나는 한국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내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이 어떤 의견을 얘기하려고 하면 대개 무시받았다. '네가 여기를 잘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거야. 네 이야기는 현실과 상관이 없어'라는 식이다. 근데 이름이 알려지고 나선 그런 반응이 싹 없어졌다. '내 목소리'가 생긴 거다."

―이후 당신의 목소리를 어떻게 냈나.

"'세계자연기금'에서 환경 관련 주장을 펴기도 했다. 요즘은 기업 쪽에서 틀을 깨는 접근을 하고 있다. 잠재력 있는 스타트업들을 도와주는 일이다. 일단 한국 회사들은 기술력이 엄청나다. 그런데 시장에 나오려면 5~6년씩 걸린다. 나는 시간이 지연되는 데 드는 비용을 줄여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 그래서 지금은 작은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면서 바이오테크 기술이 있는 스타트업을 돕고 있다. 비즈니스 모델에 대해 대화도 하고, 브로슈어나 웹사이트 등을 활용해 외부 창구와 소통할 수 있게 돕기도 하고. 규모가 작아 많은 일을 할 순 없지만, 신기한 경험들을 하고 있다. 이를테면 '줄기세포 배양 배지(培地)' 같은 것. 원래는 소의 태 혈청(牛胎血淸·FBS)을 많이 쓰는데 이게 임신한 소 배를 갈라놓고 태아를 꺼내는 거라 비윤리적이라는 문제가 있다. 근데 고객사 한 곳이 인공배양 배지를 개발했다. 기술로써 윤리적 문제를 해결한 거다. 이런 기술이 실제로 세상에 나오게끔 연결해주고 밀어주고 싶다."

인터뷰 내내 신나는 말투로 콘텐츠를 풀어놓던 그는 자기 역할이 너무 재밌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에 하버드 보건대학원이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를 연구 중이다. 그래서 우리 회사도 파트너십을 맺고 같이 연구 중인데, 재미있는 게 엄청 많다." 재밌는 게 너무 많아 쉴 틈이 없는 청년. 좋아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좇는 중이었는데, 그는 지금 로켓 같은 추진력과 가속력까지 얻었다.

About 타일러 라쉬

2006 시카고대 국제학부 입학

2012 서울대 외교학 석사과정 입학

2015 '비정상회담''뇌섹시대 - 문제적 남자' 출연

2017 컨설팅회사 '티에이블' 설립

2018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의 '파시즘' 번역 출간


조선일보 B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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