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행복한 내 집… 감자 다듬던 할머니가 처음 웃었다

손호영 기자
입력 2018.11.21 03:04

[치매실종 1만명] [下] 서초 '치매안심하우스' 가보니
전국에 유일한 '치매 모델하우스'
침대 낮추고 주방기구에 이름표, 빨래접기·이불개기 등 생활훈련

현관문 열고 들어가니 부엌에서 '탁! 탁! 탁!' 감자 써는 소리가 났다. 치매를 앓는 이박순(가명·76) 할머니가 감자조림을 만들려고 감자를 썰다, 도마 소리가 조금 크게 나자 "어머나!" 하고 자기 소리에 놀랐다. 옆에 있던 작업치료사가 "괜찮아요. 더 썰어볼까요?" 하고 할머니 손을 잡아줬다.

작업치료사와 함께 하는 요리… 환자 눈높이 맞춘 '치매안심하우스' - 19일 서울 서초구의‘치매안심하우스’에서 치매를 앓고 있는 한 할머니가 작업치료사와 함께 요리를 하고 있다. 치매 환자도 안전하게 요리할 수 있도록 작업 도구마다‘칼’‘프라이팬’등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손호영 기자
이곳은 살림집이 아니라, 작년 7월 서초구청이 내곡동에 문을 연 '치매안심하우스'다. 서초구청은 치매환자들을 위한 내곡느티나무 쉼터 건물 4층을 일반 가정집(83㎡·25평)처럼 꾸며놨다. '치매 환자가 사는 집은 이렇게 꾸며놓으면 관리가 쉽다'고 환자와 보호자에게 알려주는 일종의 모델하우스다. 이곳을 보고 가서 각자 자기 집도 이런 식으로 바꿔보라는 취지다.

언뜻 보면 보통 집과 똑같지만, 디테일이 달랐다. 일반 싱크대는 85~90㎝ 높이지만, 할머니가 작업하는 싱크대는 80㎝ 높이였다. 어르신 평균 키를 기준으로 약간 낮게 만든 것이다.

또 모든 물건에 그림과 함께 이름표가 붙어 있다. 싱크대 주변 찬장에도 '칼' '프라이팬' '쟁반' '컵' 같은 이름표가 붙어 쉽게 찾을 수 있게 했다. 단어와 글자를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하는 효과도 있다. 전화기, 시계에 쓰여 있는 숫자는 2m 뒤에서도 보일 만큼 큼직했고, TV 아래는 '아침마당' '6시 내고향' 같은 프로그램이 몇 시에 몇 번에서 하는지 적혀 있었다. 화장실 바닥은 미끄러지지 않게 까끌까끌했다. 주방에는 대형 냉장고 대신 작은 냉장고를 둬서 음식을 쉽게 찾도록 했다.

이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디테일이 살아있는 건, 8년간 치매 환자 수백 명을 돌본 자원봉사자 장현섭(68)씨가 내부를 설계한 덕분이다. 장씨는 2009년 말 공군 대령으로 퇴역한 뒤 서초구 치매안심센터에서 8년째 자원봉사 중이다. 치매 환자들이 침대가 높아 넘어지는 모습, 물건 찾기 힘들어하는 모습, 샤워하다 미끄러지는 모습을 수없이 봤다. 치매 환자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집은 어떤 모습인지 모델하우스를 만들어 보호자들에게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아이디어를 냈다.

서울시가 '주민 제안사업'으로 채택해 1억원을 댔다. 작년 7월부터 1년 4개월 동안 2000여 명이 다녀갔다. 이곳에서 보호자들은 시설 곳곳을 살펴보며 환자들이 집에서 무슨 활동을 하면 좋을지, 집을 어떻게 꾸미면 좋을지 아이디어를 얻는다. 치매 노인들은 작업치료사들과 함께 집 안에서 안전하게 생활하는 요령을 훈련한다. 식탁에서 식사하기, 빨래 접기, 이불 개기처럼 생활에 꼭 필요한 일을 다시 배우는 '학원'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치매 환자들은 자택에선 더 이상 혼자 못 하는 활동을 작업치료사들의 도움을 받아서 다시 해보곤 한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어르신은 휴대폰으로 인물 사진을 촬영하거나 풍경 사진 찍는 법을 배우고, 요리를 좋아하면 샌드위치 등 간단한 요리를 한다.

감자조림을 만들던 이 할머니는 치매 중기로 5년 전부터 약을 먹고 있다. 1년 전부터 급격히 나빠져 가끔은 자식·며느리를 못 알아보기도 한다. 할머니는 요리하다가 자주 입으로 뭔가를 가져갔다. 짠 양념장을 갑자기 한 수저 먹기도 했다. 지난해 집에서 가스불을 올려놓고 잊어버려 불을 낼 뻔한 뒤로 가족들이 요리를 못 하게 한다.

대신 남편 김완영(가명·78) 할아버지가 요리하고 싶어 하는 아내를 매주 이곳에 데려온다. 여기 와서 하고 싶은 요리도 하고, 치료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라는 배려다. 7주 과정에서 이날이 마지막이었다. 할아버지가 뒤에서 지켜보며 "감자조림 맛있겠다"고 하자, 할머니가 수줍게 웃었다.

아직 이런 시설은 우리나라에 이곳 한 곳뿐이다. 손치근 한국치매협회 사무총장은 "과거에는 치매 환자들을 위해 요양시설을 짓는 걸 중시했지만, 요즘은 치매 환자들이 최대한 오랫동안 자기 집에 머무르며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해나가도록 돕는 쪽으로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고 했다. 그래야 치매 환자 자신의 행복도도 올라가고, 국가와 사회의 부담도 적다. 손 총장은 "치매 환자가 되도록 오래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훈련할 수 있도록, '치매안심하우스' 같은 시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했다.


조선일보 A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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