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리포트] 美 "북한이 급하지 우리가 급한가"

입력 2018.11.09 03:15

북한 문제 비중 작아져 장기전 채비하는 모습
대북 외교 작동 않을 땐 볼턴 등 강경파 나올 것

강인선 워싱턴 지국장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9월 뉴욕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시간 싸움 하지 않겠다. (비핵화가) 2년이든 3년이든 문제가 안 된다"고 했다. 중간선거 다음 날인 7일 기자회견에서도 트럼프는 북핵 문제와 관련, "제재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서두를 것 없다"고 했다. 이날은 "서두를 것 없다"는 말을 일곱 번쯤 했다. 제재 완화에 목을 매는 북한이 급하지 미국은 전혀 급할 것이 없다는 '선언'으로 들렸다.

지난 6월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을 앞뒤로 북핵과 관련해 자주 쓰이던 '전격적' '일괄' '극적' '급물살' '빅딜' 같은 단어가 요즘 거의 들리지 않는다. 트럼프는 '비핵화'라는 목표와 '제재'라는 수단만 쥐고 장기전 채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 실험을 하지 않는다면 이런 상태가 상당 기간 유지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의 핵심 외교·안보 참모들의 움직임에서도 북핵 문제에 대한 트럼프 정부의 온도를 잴 수 있다. 최근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과 하는 대화'란 행사에 간 일이 있다. 매티스는 거의 한 시간 동안 미국이 주력하는 국제적 안보 이슈에 대해 이야기했다. 거기서 북한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미미했다. 매티스의 관심은 중동과 러시아, 중국이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북한 문제는 '외교'에 할당된 분야로 국방장관보다는 국무장관 손에 달린 일이란 뜻이다.

야망이 큰 정치인인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북핵에 자신의 정치적 자산을 쏟아붓고 있다. 어쩌면 북핵 해결 성과가 그의 정치적 미래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것이다. 워싱턴의 한 전문가는 "폼페이오가 내리는 판단은 북한과 관련한 트럼프의 결정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신뢰를 받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폼페이오가 이끄는 미·북 대화는 아직 본격적 비핵화 협상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폼페이오 주도 북핵 국면에선 한발 떨어져 있다. 중국, 러시아, 이란과 관련한 활동이 더 많다. 하지만 그는 "대북 선제공격이 여전히 개인적 소신"이라고 말하는 초강경파이다. 워싱턴에선 폼페이오의 대북 외교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판단이 섰을 때, 더 강경한 카드를 든 볼턴이 대안일 수도 있다는 말이 나온다.

북한 비핵화에 관한 한 워싱턴은 비관적 시선이 우세한 땅이다. 지난 6월 싱가포르에서 트럼프·김정은 회담이 열려 북핵 문제의 극적 돌파구에 대한 기대가 한창 높았을 때도 전문가 대부분은 좀처럼 흥분하지 않았다. 이런 워싱턴 분위기에 대해 서울에서 온 정부 인사나 전문가들이 종종 "워싱턴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왜 이렇게 비관적이고 강경하냐"며 놀란다. 그런 말을 들으면 워싱턴 전문가들이 더 놀란다. 지난 4반세기 북한이 행동으로 써온 북핵 협상 실패 역사를 보면 북한이 스스로 비핵화할 가능성은 극히 낮기 때문에 부정적이고 비관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왜 모르냐는 것이다.

최근 뉴욕에서 열릴 예정이던 미·북 고위급 회담이 갑자기 연기됐을 때도 워싱턴에선 거의 조건반사처럼 비관적 분석이 쏟아졌다. 국무부가 일정을 재조정하고 있다는데도, 폼페이오호(號)가 대화의 동력을 잃고 공전(空轉)하고 있다는 우려가 그치지 않았다. 미·북이 몇 번 고위급 대화, 정상회담 준비와 연기를 반복하다 보면, 비핵화는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곧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 전력투구해야 하는 시기가 올 것이다. 중간선거가 끝나자마자 나온 트럼프의 "서두를 것 없다"는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조선일보 A35면
네이버구독하기

오늘의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