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 칼럼] 文 정권, 비난만 하지 말고 제발 직접 해 보라

선우정 사회부장
입력 2018.11.07 03:17

'식민지 배상' 판결로 막중한 책임을 안았다
줄기차게 비난한 '적폐'들의 성과를 능가할 역량이 있나… 도망가지 말라

선우정 사회부장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왜 위안부 합의를 깨지 않을까. 문 대통령은 2015년 양국 정부의 합의 당시 야당 대표로서 "10억엔에 우리 혼(魂)을 팔아넘겼다"고 맹비난했다. 정권을 잡은 뒤에는 위안부 합의 검증팀을 만들어 '문제투성이'라고 낙인찍었다. 10억엔을 국민 세금으로 메꿔 치유금의 의미를 없애 버렸다. 재단 해산도 결정했다. 이제 껍데기뿐이다. 그런데 일본엔 "합의를 파기하거나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일 관계를 걱정하기 때문일까.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짐작할 수 있다. 합의를 파기하면 그걸로 끝이 아니다. 새 조건을 들고 일본과 부딪쳐야 한다. 파기만 선언하고 가만있으면 다시 위헌(違憲) 상태에 직면한다. 노무현 정권 때 겪은 일이다. 2005년 노 정권은 1965년 양국이 맺은 청구권 협정을 검증했다며 "위안부 배상은 해결되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정의를 실현했다"며 박수를 받았다. 그런데 이듬해 위안부 피해자들에 의해 위헌 심판대에 올랐다. '배상권이 있다고 선언해 놓고 정작 배상권을 실현할 외교적 노력을 안 한다'는 이른바 '부작위(不作爲)' 문제였다. 언행(言行)이 다르다는 것이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노 정권의 과거사 잔치가 남긴 빚은 다음 정권에 돌아갔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이 2011년에 나왔기 때문이다. 세게 덤벼들었다가 한·일 관계를 악화시켰지만 그래도 이명박 정권은 행동했다. 박근혜 정권은 말할 것도 없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내걸고 정상회담을 거부하는 무리수까지 동원했다. 그러다 2015년 위안부 합의가 나왔다. 그런데 이 합의를 노 정권의 후계자들이 잔인하게 난도질했다. "정의를 구현했다"며 또 박수를 받는다.

이제 문 정권 차례다. "혼을 팔아넘겼다"고 했으니 "혼을 되찾겠다"며 피해자가 만족할 협상안을 들고 일본에 돌진해야 한다. 그런데 "재협상은 없다"며 웅크리고 있다. 그러면서 '위안부 합의가 피해자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며 위안부 할머니들이 제기한 헌법소원에 대해 "청구 요건에 맞지 않는다"고 맞선다. 역시 언행이 다르다. 보수 정권이었다면 온갖 시민 단체로부터 "뼛속까지 친일"이란 맹공을 당했을 것이다. 이번에도 정의의 열매만 다 따먹고 도망가 다음 정권에 빚을 넘길 작정인가.

지난달 30일 징용 피해자 배상에 대한 대법원 판결의 문제점은 9월 14일, 10월 31일 자 특집 기사를 통해 자세히 다뤘으므로 재론하지 않겠다. 여기선 역사적 의미를 말하고 싶다. 대법원은 징용 피해자의 배상권을 인정하는 근거로 1965년 청구권 협정에 식민지 배상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 판결에 반대하면 "친일(親日)이라 저런다"는 말을 듣는다. 상투적이나 위력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친일·반일의 잣대로 다루면 대한민국 더 깊은 곳이 무너진다.

우리 사회엔 국가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이 있다. 박정희 정권을 경멸하는 그들의 지력(智力)으론 한국의 경제 발전을 수용할 수 없다. 그래서 경제 발전의 종잣돈인 청구권 자금의 성격을 반세기 이상 물고 늘어졌다. 한국 경제는 굴욕 외교, 구걸 외교로 챙긴 일본의 협력 자금으로 세운 모래성이라는 것이다. 국가 정통성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이 자금을 식민지 배상과 다름없는 '희생의 대가'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받을 돈을 후대가 당당하게 받아 스스로 경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대법원 판결은 이 자금의 배상적 성격을 부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한쪽 세력에 힘을 실었다. 문 정권의 '징용 재판 지연' 수사에 밀리다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렸다. 청구권 자금이 투입된 포스코, 소양강댐, 경부고속도로, 한강 철교, 영동화력발전소는 이제 일본의 선물인가.

정부는 "판결을 존중한다"고 했다. 문 정권은 일본을 상대로 수많은 피해자의 배상권을 실현하기 위해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해야 한다. 막중한 의무다. 지체하면 또 위헌이다. 노 정권처럼 '부작위' 오욕을 타인에게 뒤집어씌우지 말고 식민지 배상을 주장해야 한다. 여전히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옛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 배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 시선을 느껴라. 53년 전 청구권 협정에 서명한 이른바 '적폐'들이 시대와 국력의 한계 속에서 어떤 고난을 겪고 결실을 이뤘는지, 그 일부라도 공감하라. 비난만 하지 말고 제발 직접 해 보라.

문 정권은 그동안 비난해온 그들을 능가할 수 있을까. 위안부 배상, 식민지 배상을 이뤄낼 역량이 있을까. 정권을 둘러보면 바로 보인다. 외교적 밑천이.



조선일보 A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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