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英 노동당 중진 의원의 '소신'

김아진 런던 특파원
입력 2018.11.06 03:14
김아진 런던 특파원
필립 해먼드 영국 재무장관이 지난달 말 내년도 정부 예산안을 발표했다. 핵심은 10년간의 긴축 정책을 끝내고 재정을 풀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날 함께 발표된 소득세 감면안은 더 큰 논란이 됐다. 유력 싱크탱크인 '레절루션 파운데이션'은 "이 감세안을 통해 소득 상위 10%가 압도적 혜택을 받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노동당과 진보 성향 언론 매체들은 "부자 감세"라고 비판했다.

이 와중에 존 맥도널(67) 노동당 의원은 '이단아'로 비쳤다. "나중에 선거에서 이기더라도 이 소득세 감면안을 뒤집지 않겠다"는 발언 때문이다. 1997년부터 헤이즈앤할링턴구(區) 국회의원인 그는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라고 공언하는 강경 좌파 인사로 이익 공유제, 민영화 반대, 금융권 규제, 최저임금 인상 등에 앞장서 왔다. 제러미 코빈 노동당 현 대표의 오른팔이면서 노동당 집권 시 재무장관으로 내정돼 있는 중진이다. 이처럼 비중 있는 정치인이 당 방침을 정면 거스르며 보수당 정부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맥도널 의원 때문에 노동당이 양분됐다"(더 타임스) "맥도널이 당내 반발을 무릅쓰고 충격적 발언을 했다"(데일리 익스프레스)…. 언론에서 큰 화제가 되면서 당내 반발까지 불거졌다. 노동당 소속인 앤디 번햄 멘체스터 시장은 "정부가 거리에서 죽어가는 영국인들보다 부유한 사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겠다는 것인데, 맥도널이 실수한 것"이라고 했고, 데비이드 라미 의원은 "부유층을 돕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맥도널 의원은 발언을 거둬들이지 않고 "당내 비판을 모두 이해한다"면서도 "감세안이 영국 경제에 수요를 창출할 것이기에 지지한 것"이라고 했다. 세금 인하로 소비가 촉진되면 경제가 활성화되는 선순환이 벌어질 것이라는 얘기다. 내년 3월로 예정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앞두고 위기설이 나도는 영국 경제 현실을 정치적 진영 논리보다 우선한 것이다.

그는 당 안팎의 비판이 계속되자 기자 간담회를 열어 "우리는 보수당이 해온 어떤 정책적 기반이라도 승계할 것이며, 그 위에서 새로운 정책을 만들 것"이라고 못 박았다. 나중에 총선 승리로 노동당이 집권해도 예전 정부 정책을 무조건 버리지 않고 지킬 건 지키겠다는 선언이었다.

맥도널 의원의 소신에 찬 행동을 보면서 진영 논리에 따라 반대편 정책은 무조건 반대하고, 신념도 원칙도 없이 당론이라는 이름으로 똑같은 목소리를 내는 한국 정치 현실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우리 정치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전 정권 것은 모두 허물어버린다. 이런 정치 풍토가 계속되는 한, 우리가 영국 수준의 선진 민주주의로 올라설 것이라는 기대는 너무 요원한 사치일 것 같다.


조선일보 A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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