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서 온 괴짜 연출가, 그가 해석한 '인형의 집'은…

양승주 기자
입력 2018.11.01 03:01

유리 부투소프 "여성 해방·성 평등 외에도 인간의 삶에 중점을 둔 작품"

"고전이 사랑받는 이유는 인간의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죠. 내 역할은 고전 속 메시지를 시대에 맞게 다듬는 일입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연극 연출가 유리 부투소프(57)가 10년 만에 한국 관객들과 만난다. 서울 예술의전당 개관 30주년을 맞아 6~25일 공연하는 헨리크 입센 작품 '인형의 집' 연출을 맡았다. 그는 2008년 예술의전당 20주년 기념 연극도 연출했다. 당시 연극 '갈매기'는 안톤 체호프의 원작 스토리를 뒤집는 파격으로 찬사를 받았다. 이번 무대도 색다를 게 분명하지만, 그는 "작품에 대해 미리 말하면 관객에게 선입견을 줄 수 있다"면서 언급을 꺼렸다. 부투소프는 34세에 러시아 공연계 최고 권위 '황금 마스크상'을 수상하고 현재 러시아 대표 극장인 모스크바 바흐탄고프극장 수석 연출가로 있다. 고골, 실러, 셰익스피어 같은 고전을 독창적으로 재창조하는 연출로 이름 높다.

부투소프는 “작품을 만든 사람들의 영혼이 관객에게 전달되는 순간을 가장 바란다”고 했다. /장련성 객원기자

10년 전 연출한 '갈매기'도 체호프식 리얼리즘을 철저히 배반했다. 원작은 주인공들이 지닌 꿈과 사랑이 좌절되며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그려내지만, 부투소프는 이 연극을 온통 골판지로 둘러싸인 을씨년스러운 무대 위에서 파국 이후의 삶을 조명하는 부조리극으로 만들었다.

원작 '인형의 집'은 순종적인 주부 '노라'가 결혼 전에는 아버지의 인형으로, 결혼 후에는 남편 헬메르의 인형으로 살았음을 깨닫고 집 문을 나서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1879년 발표돼 140년 가까이 여성 해방과 성 평등의 상징이 된 작품이다. 그러나 부투소프는 "'인형의 집'은 여성 문제 외에도 정치와 자유, 책임감 같은 삶의 요소를 폭넓게 다루는 작품"이라며 "무대와 의상 등 모든 것에서 '인간의 삶'을 환기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했다.

정운선(노라), 이기돈(헬메르) 등 출연 배우 5명은 부투소프가 직접 선발했다. "러시아엔 '재능과 노력, 훈련이 모두 준비됐다면 나머지는 신의 손에 맡기면 된다'는 속담이 있어요. 한국 배우들이 딱 이 말에 어울립니다." 그는 "다만 연극 시스템이 체계적이지 않다. 배우가 연극에만 집중하며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기반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부투소프는 선박 기술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29세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공연예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내게는 무대와 배우가 있는 곳이 자유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라고 했다. (02)580-1300


조선일보 A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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