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美가 韓에 '대북 제재 해제 말라' 경고, 이런 일이 있나

입력 2018.10.12 03:19
트럼프 미 대통령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5·24 조치 해제 검토 발언에 대해 "그들(한국 정부)은 우리 승인 없이는 그것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평소 말을 가리지 않는 트럼프이긴 하지만 우리 주권 침해로 해석될 수 있는 '승인'이란 표현까지 썼다. 미국 입장에서 대북 제재는 북핵 폐기를 위한 유일한 지렛대다. 트럼프는 한국 정부에 '북핵 폐기 방해 말라'고 거칠게 경고한 것이다.

5·24 조치는 그 주요 내용들이 유엔 안보리 제재 결의와 상당 부분 겹친다. 한국 정부가 5·24 조치를 해제해서 그동안 금지됐던 남북 사업을 하겠다는 것은 유엔 제재 대열에서 이탈하겠다는 뜻이다. 더구나 북한, 중국, 러시아 세 나라는 "유엔 안보리가 대북 제재 조치 재검토에 착수해야 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런 마당에 한국 정부가 5·24 조치를 해제하면 한·북·중·러가 한편이 돼서 미국의 제재에 맞서는 꼴이 된다. 트럼프가 화를 내자 정부는 말을 주워담고 있지만 속내는 대북 제재를 해제하고 싶을 것이다.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강 장관과의 통화에서 평양 남북 정상 선언 중 '남북 철도 연결 연내 착공'과 '군사 분야 부속 합의'에 대해 항의한 사실도 뒤늦게 확인됐다. 대북 제재에 저촉될 가능성이 높은 남북 철도 연결과 한·미 연합 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군사 합의에 대해 한국 정부가 충분한 사전 협의를 거치지 않은 데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우리 정부가 남북 관계 개선에 조바심을 내면서, 비핵화의 구체적 진전 때까지 대북 제재망을 유지하려는 미국 정부와 입장차를 드러내는 장면이 계속 나오고 있는 것이다.

비핵화가 좌절돼서 북이 핵보유국이 되면 그 위협에 노출되는 직접 당사자는 대한민국뿐이다.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사 실험을 중단했다. 북이 ICBM 폐기 카드로 미국과 타협할 것이라는 관측도 계속 나오고 있다. 미국에 대한 위협만 제거한 상태에서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겠다는 전략이다. 지금 단계에서 대북 제재가 흐트러지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절충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대한민국 5100만 국민만 북핵의 포로로 남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 오는 것이다. 다른 나라가 대북 제재를 이탈하려는 것이 아닌지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야 할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성과로 포장하기 위해 어정쩡한 비핵화 합의를 하려 하면 우리가 도리어 화를 내며 항의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김정은 수석 대변인 노릇을 하고, 미국이 한국 정부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전도된 상황은 재앙을 부를 수 있다.
조선일보 A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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