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등보다 관리소홀이 더 크다...경찰 "송유관공사 과실 집중수사"

박성우 기자 고성민 기자
입력 2018.10.11 15:03 수정 2018.10.11 15:36
‘22분’
풍등(風燈) 하나에서 시작된 경기도 고양시 저유소(貯油所) 대형 화재 사건이 폭발로 이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22분 사이에 저유소 안전관리 시스템은 사실상 ‘불능(不能) ’에 빠졌다.

전문가들은 이번 고양 저유소 화재원인의 본질은 ‘불씨’를 제공한 스리랑카인이 아니라 대한송유관 공사의 과실(過失)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우연히 내려 앉은 풍등 하나에 43억원에 이르는 피해를 볼 정도로 허술하게 관리 했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 7일 오전 10시36분 풍등이 저유소 잔디에 떨어진 뒤 연기가 나기 시작했고, 오전 10시54분 폭발까지 18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이 18분 동안 송유관공사 측은 연기가 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몰랐던 것으로 조사됐다. 공사 측은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폭발이 벌어진 다음에야 소방당국에 신고했다. ‘골든타임’을 놓친 것이다.

지난 7일 경기 고양시 화전동 대한송유관공사 저유소에서 휘발유 탱크가 폭발해 화재가 발생, 소방대원들이 진압에 나서는 모습. /조선DB
경찰은 당초 수사력을 풍등을 날린 스리랑카인 D(27)씨에 집중했다. D씨가 범인으로 지목되자 ‘역풍’이 일었다. 화재의 원인은 부실한 안전관리에 있는데 스리랑카인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다는 것이다. 결국 검찰마저 ‘연관성 입증’이 부족하다면서 경찰이 신청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D씨 구속에 실패한 경찰은 송유관공사 과실 여부에 대한 수사에 집중하고 있다.

경기북부경찰청은 기존 고양경찰서 강력팀에 광역수사대 인력 11명을 추가 지원, 총 22명으로 구성된 저유소 화재 사건 전담팀을 편성했다. 고양경찰서 관계자는 "관련 분야 전문가들과 협업해 송유관공사에 대한 업무상 과실 혐의와 저유소 시설의 안전 결함, 안전관리 매뉴얼 준수 등을 집중 수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45개 CCTV ‘무용지물’…"국가 중요 시설 조차 아냐"
사건 이후 송유관공사의 관리 소홀도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고양 저유소에는 총 14기의 유류 탱크가 있고, 이를 지키기 위해 총 45개의 폐쇄회로(CC)TV 카메라가 설치됐다. 잔디에 불이 붙고 폭발 직전까지 연기가 나는 장면을 관제실 CCTV를 통해 충분히 볼 수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근무자 누구도 이를 유심히 보지 못했다.

저유소 통제실은 2인1조로 근무를 하는데, CCTV만 보는 전담 인력조차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 45개의 CCTV 화면은 육안으로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크기가 작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통제실 모니터에 여러 개의 화면이 동시에 격자형태로 뜨기 때문이다. 경찰 조사 결과 사고 당시 근무자는 1명만 통제실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송유관공사 관계자는 "근무자 1명은 당시 탱크 제어를 하고 있었고, 나머지 한명은 출하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며 "현재 경찰에서 근무자에 대한 조사도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허술한 안전관리 체계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외부 전문가가 저유소 유류탱크를 개방해 실시하는 정밀진단은 11년에 한 번씩 하도록 돼 있다. 안전점검은 송유관공사 측이 매년 1회 ‘자체 검사결과’를 해 관할 소방서에 보고하는 것이 전부인 셈이다.

8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화전동 대한송유관공사 경인지사 저유소에서 국과수 등 유관기관들이 전날 발생한 화재 합동 감식을 펼치고 있다. /조선DB
송유관공사가 관리하는 전국 저유소 8곳 가운데 저장용량이 가장 큰 판교 저유소(약 3억1300만 리터)는 국가중요시설이다. 국가중요시설은 적(敵)에 점령되거나 파괴되는 등 기능이 마비될 경우 국가안보와 국민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주게 되는 시설을 뜻한다. 이에 따라 판교 저유소는 정부 지침에 따라 매년 두 차례 점검을 받고, 민관군 합동훈련인 을지연습 때 화재 대비 훈련도 한다.

송유관 공사가 운영 중인 전국 저유소 8곳에 우리나라가 6~7일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유류가 보관돼 있다. 작전 관련 부서에서 근무하는 현직 군간부는 "전쟁 시 중요한 공격 지점은 적군의 식량과 에너지원을 파괴하는 것"이라며 "저유소가 모두 폭파될 경우 전쟁이 나기도 전에 경제적 마비로 국가 체계가 위협에 빠질 수 있기에, 저유소는 국가 중요 시설로 체계적인 관리감독이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 불이 난 고양저유소를 포함해 나머지 저유소 7곳은 저장 유량이 기준(1억5000만 L)에 미달해 국가중요시설로 분류되지 않는다. 고양저유소는 2014년 이후로 외부 정밀 진단을 받지 않았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국가중요시설의 기준을 낮춰 저유소가 철저한 안전 진단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 ‘모르쇠’ 일관하는 송유관공사 "돈 많이 든다, 효율 떨어진다, 모르겠다"
일부에서는 이번 사고와 관련해 불길에 취약한 유증기를 회수하는 장치가 설치됐다면, 화재를 미연에 방지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경찰은 이번 화재가 잔디밭에 풍등이 떨어지면서 발생했고, 여기서 발생한 불씨가 유증기 환기구로 빨려 들어갔다고 보고있다.

송유관공사 측은 유증기 회수장치를 설치하지 않은 이유로 ‘비용’을 얘기했다. 이 장치는 기술방식에 가격이 대당 15억~17억원 수준이다. 송유관공사 관계자는 "고양에 14기, 판교에 40기, 전국을 다 합치면 200기의 탱크가 있는데 유증기 회수장치를 설치할 경우 최소 3000억원의 비용이 투입된다"며 "설치하는 건 소방법 상 의무가 아니고, 효율에 비해 비용도 너무 많이 든다"고 했다.

9일 경기 고양시 고양경찰서에서 대한송유관공사 경인지사 화재사건 피의자 검거 브리핑이 열린 가운데 수사관계자들이 피의자 스리랑카인이 사용했던 풍등과 같은 모양의 풍등을 제시하며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조선DB
고양 저유소에 설치된 자동 감지기는 2대 뿐이었다. 이 마저도 화재감지기가 아니라 유증기 감지용이었다. 유증기 감지기는 불이 났을 때 나오는 불꽃, 연기, 가스는 감지할 수 없다. 담배꽁초와 같은 인화성 물질이 잔디에 떨어져 불이 나더라도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 한 자동으로 감지할 수 있는 장치가 전무한 것이다.

저유소에 심은 잔디도 문제다. 유류 탱크와 같이 화재와 폭발의 위험성이 큰 시설에 불이 잘 붙는 잔디를 왜 심었는지 의문이 드는 상황. 현재 송유관공사가 관리하는 전국 저유소 8곳 가운데 기름탱크 외부에 잔디가 심어져 있는 곳은 고양 저유소 뿐이다. 나머지는 아스팔트로 돼 있다. 송유관공사 측은 "고양 저유소 시설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잔디가 있었는데, 왜 그랬는지는 조사과정에서 나올 것 같다"고 했다.


◇ 민영화 이후 시설투자 ‘뚝’…117억 배당 잔치
일각에서는 송유관공사가 ‘민영화의 실패사례’라는 얘기도 나온다. ‘수익’에 초점이 맞춰진 기업이 지분의 90%를 가진 주요 주주인 만큼 ‘공공 안전’은 후순위로 밀릴 수 밖에 없는 구조라는 의미다.

송유관공사는 1990년 설립 후 10년간 약 8800억원을 들여 전국에 송유관로를 구축, 적자에 시달렸다. 하지만 2001년 정부 지분을 민간에 매각했다. 현재 SK이노베이션이 지분 41%가진 최대주주다. 이외 GS칼텍스(28.62%), 에쓰오일(8.87%), 현대중공업(6.39%), 대한항공(3.10%), 한화토탈(2.26%)도 주주로 참여하고 있다. 정부(산업통상자원부) 지분은 9.76%에 불과하다. 공기업에서 민영 기업으로 전환한 후 30%의 영업이익률을 내는 알짜 회사로 변신했다.

한국산업조직학회가 2016년 2월 산업통상자원부에 제출한 '석유유통 물류시스템 개선방안 연구'에 따르면 2001년 이후 송유관공사의 시설투자액은 약 99억원 수준이었다. 이는 8952억원( 2017년)에 달하는 대한송유관공사의 설비 등 자산의 1.1%에 불과한 수치다. 민영화 이전 10년간 공사 측은 연 평균 880억원 규모의 시설투자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송유관공사는 지난해 매출 1580억원, 영업이익 465억원이었고, 이중 117억원을 배당했다. "수익을 우선시해 안전 투자가 미흡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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