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때를 놓치면 재앙이 닥친다

이한수 문화부 차장
입력 2018.10.10 03:15

지휘부가 현장 확인 외면해 140만 일본軍 病死 또는 餓死
文 정부, 현실 고통 直視하고 '좋은 일자리'에 총력 쏟아야

이한수 문화부 차장
정책 전환 시기를 놓쳐 처참한 결과를 초래한 극명한 사례가 있다. 일본이 20세기에 침략 전쟁(중일전쟁·태평양전쟁)을 벌여 죽게 한 자국민은 약 310만명이다. 그중 91%가 1944년 이후 사망했다. 1년여만 앞서 전쟁을 멈췄다면 281만명이 살 수 있었다.

이 가운데 군인 사망자는 230만명이다. 대부분 전사(戰死)가 아니었다. 61%에 이르는 140만명이 굶어 죽었다. 정확히 아사(餓死) 또는 영양실조로 인한 병사(病死)였다. 전선(戰線)이 길어져 보급이 어려워지면서 극심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자살로 삶을 마치는 병사가 속출했다. '처치(處置)'란 이름으로 부상병을 죽이는 일도 잦았다. 이오지마(硫黃島) 전투 생존자가 증언했다. "전사는 30% 정도, 나머지 사망자 70% 중 6할이 자살, 2할이 타살·사고사였다."

지난해 말 일본에서 출간된 연구서 '니혼군헤이시(日本軍兵士)'는 비참한 상태에 놓였던 일본군 병사의 현실을 치밀하게 서술한다. 올 4월 오사카 출장 때 쓰타야 서점에서 샀는데 출간 석 달 만에 6쇄를 찍은 판본이었다. 아사히신문은 6월 23일 자에서 '팔리는 책(베스트셀러)'으로 소개했다. 저자 요시다 유타카 히토쓰바시대 교수는 "일본군이 용맹하고 강했다는 식의 예찬론이 최근 많이 나오고 있다"고 우려하면서 "당시 전장(戰場)의 처참한 현실을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두고 책을 썼다"고 했다.

우리 현실을 일제의 침략 전쟁 상황에 비유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이 책의 연구 방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시다 교수는 "병사의 시선과 입장에서 전장의 현실을 밝히려 한다"고 했다. 실제 전쟁이란 현실을 겪는 병사의 생활과 건강 상태 같은 개인의 삶에 주목한 것이다. 군 지휘부의 전쟁 전략이나 군사 이념 같은 거시 분석은 현장에서 고통받는 개인의 삶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현 정부 출범 후 국내에서 고용 참사가 이어지고 있다. 올해 1~8월 월평균 실업자가 113만명이다. 현행 기준(구직 기간 4주)으로 통계를 작성한 1999년 6월 이후 가장 많은 숫자다. 지난해 연평균 32만명 늘었던 취업자는 올 7월 5000명, 8월 3000명으로 증가 폭이 급격히 추락했다. 모레 발표할 9월 통계에서는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삶은 어떨까. 최근 연구가 일부 실상을 보여준다. 정희연 서울대 보라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팀에 따르면 취업 준비생 3명 중 1명(39.5%)은 우울증을 겪고 있고, 7명 중 1명(15.3%)은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 이철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연구를 보면 40~50대 남성 저소득 자영업자의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113명으로 같은 조건의 임금 근로자(42명)의 3배 정도로 높았다.

현장의 고통을 외면할 때 재앙이 닥친다. 일본군 병사 한 사람이 짊어지고 다닌 배낭 무게는 소총을 포함해 30㎏이 넘었다. 몸무게 절반에 이르는 짐을 지고 매일 수십㎞를 행군해야 했다. 전쟁 공포로 패닉 상태에 빠져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는 병사가 많았다. '용맹한 황군(皇軍)'이라는 구호는 허울뿐이었다. 도쿄 지휘부가 직접 현장을 확인하고 병사들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봤다면 전쟁을 멈춰야만 했다.

지금 벌어지는 우리 현실을 보면 '일자리 정부'라는 구호는 허울뿐이다. 현재 상황이 지속된다면 1년여 후 어떤 재앙을 겪게 될지 불안하기만 하다. 다행히 정책 전환의 기미가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달 4일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건 결국 기업"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A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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