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병역 의무 무시하더니 4만 대군이 전멸했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입력 2018.09.12 03:01 수정 2018.09.12 15:47

[136] 문약(文弱)으로 참패한 병자호란 쌍령 전투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 326-4번지 산기슭에 집이 한 채 앉아 있다. 인도도 없는 도로에 홍살문이 솟아 있고 그 너머 한 칸짜리 기와집이 있다. 사당이다. 정충묘(精忠廟)라 한다.

음력 정월 초사흘이면 광주 이씨 부원군파 집성촌인 초월읍 쌍령리 사람들은 정충묘에 제사를 지낸다. 381년 전 마을 앞 고개에서 조선군이 청나라 부대와 싸우다 패배한 날이다. 사당에는 그 지휘관 4명을 모셨다. 전투 이름은 쌍령(雙嶺) 전투다. 병자호란 때 벌어진 전투다.

그런데 숫자가 어이없다. 청나라 기마부대는 병력이 삼백(三百)이었고 조선군은 사만(四萬) 대군이었다. 이들이 전멸했다. 오만에 빠진 조선 정부가 무(武)를 천시하고 세상을 제대로 읽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병자호란

대륙에는 만주족이 흥한 지 오래였다. 명나라는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선조 뒤를 이은 광해군은 후금과 명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했다. 1623년 5월 8일 광해군이 권좌에서 쫓겨났다. 광해군의 먼 조카 이종(李倧)을 왕위에 앉힌 반정 세력은 외교정책을 반금친명(反金親明)으로 전환했다. 패륜(悖倫)을 이유로 반정을 일으켰으니, 황제국 명(明)을 섬겨야 논리에 맞았다. 1627년 후금 왕 홍타이치가 조선을 침략했다. 정묘호란이다. 조선은 후금을 형이라 부르기로 하고 항복했다.

차량이 분주히 오가는 경기도 광주 쌍령 고개 3번 국도변에는 작은 사당이 있다. 이미지 크게보기
차량이 분주히 오가는 경기도 광주 쌍령 고개 3번 국도변에는 작은 사당이 있다. 381년 전 병자호란 때 이 고개에서 벌어진 전투 희생자를 기리는 사당 '정충묘'다. 경상도에서 동원된 4만 근왕병이 청나라 기병 300명에게 이 고개에서 몰살됐다. /박종인 기자
1636년 4월 11일 후금이 청(淸)으로 개명하고 홍타이지가 황제에 즉위했다. 심양에서 열린 즉위식에서 조선 사신 나덕헌과 이확은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광해군 조카 이종, 인조는 "우리는 명나라 동쪽 신하국(事中朝稱東藩)"(1636년 6월 17일 인조실록)이라고 후금에 큰소리쳤다. 백성에게는 "국토가 수천 리인데 앉아서 모욕을 받아야 하겠는가(坐受其辱哉)"라고 담화문을 발표했다.(1636년 5월 26일 인조실록) 이윽고 청나라가 압록강을 건넜다. 병자년 12월 9일(양력으로는 1637년 1월 4일이다), 두 번째 호란이다. 조선은, 쉽게 당했다.

사대부 심즙의 정의감

강화도로 도망가려던 전시 정부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식량은 절약해도 70일 치밖에 없었다.(연려실기술) 12월 16일 산성이 포위됐다. 심리전이 벌어졌다. 청군은 왕자와 대신(大臣)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조선 정부는 왕실 종친 한 명을 왕자로, 형조판서 심즙을 대신으로 위장해 내보냈다. 명분을 중시하는 위대한 사대부 심즙이 적에게 말했다. "평생 충(忠)과 신(信)을 말해왔다. 나는 대신이 아니고 저자는 왕자가 아니다." 놀란 종친이 손사래를 치며 "우리는 왕자요 대신"이라고 하자 적장 마부대가 포로 두 명을 죽였다.(나만갑, '병자록') 심리전 참패. 그날 인조는 비밀문서를 각 도에 보내 총동원령을 내렸다(蠟書徵諸道兵).

팔도 총동원령

총동원령에 각 도가 호응했다. 양반, 상놈, 노비 할 것 없이 관찰사가 모은 장정들이다. 정월 초사흘, 영남에서 소집된 근왕군(勤王軍)이 산성 남동쪽 광주 쌍령에 도착했다. 지휘관은 경상 관찰사 심연, 선봉장은 좌병마절도사 허완과 우병마절도사 민영이었다. 허완은 68세였고 민영은 50세였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이들이 소집한 병력은 모두 4만 명이었다. 한겨울에 동원된 병력이 천 리 길을 쉬지 않고 행군했다. 군량이 확보되지 않고 군사도 절반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관찰사 심연이 파견한 종사관 도경유는 주야로 행군을 재촉했다. 도경유는 한성부 서윤, 그러니까 부시장 아래 문관이었다. 우병마사 민영의 부관 박충겸이 항의하자 도경유는 박충겸을 참수했다.(연려실기술) 종전 후 도경유는 전투 중 도주 혐의로 유배형을 받았다가 노중에 암살당했다.(1637년 5월 21일 인조실록)

문관이 지휘한 전쟁

쌍령에 도착했다. 허완은 고개 왼쪽(동쪽) 낮은 곳, 민영은 서쪽 산등성이에 진을 쳤다. 안동 영장 선세강이 "평지에 진을 치면 위험하다"고 했다. 종사관 도경유는 "하루 쉬고 내일 바로 산성으로 출정한다"고 선언했다. 노병(老兵)이 상관인 마흔한 살 먹은 문관을 당해내지 못했다. 허완은 "능선은 방한복이 없는 군사들에게 춥다"며 평지에 목책(木柵)을 세우고 진지를 구축했다. 허완은 "병법을 모르는 문관 지시를 따르니 어찌 승리하겠는가"라 탄식했다.(박광운, '병자호란과 쌍령전투', 정충묘지) 그리하여 정월 초사흗날, 원균이 벌인 칠천량 전투(임진왜란)에 버금가는 전쟁사상 최악의 졸전이 벌어졌다. 당시 공조참의 나만갑이 쓴 '병자록' 중 '기각처근왕사(記各處勤王事)'를 인용해본다.

300 대 4만 그리고 전멸

'(허완은) 정포수는 가운데 두고 중등, 하등 포수는 바깥에 몰아 놓았다. 화약을 2냥씩(조총 10발 사격분) 나눠줬다. 1월 3일 이른 아침 적 선봉 33명이 방패를 가지고 남산 상봉(上峯)에서 줄지어 내려왔다. 최전방에 있는 하등포수가 연달아 함부로 쏘아대는 바람에 화약이 떨어졌다. 포수들은 화약을 더 달라고 연달아 소리쳤다. 적이 이 말을 알아듣고 다시 재촉하여 앞으로 나와 목책 가까이 왔다. 안동 영장 선세강이 홀로 화살 30여 발을 쏘았으나 모두 목방패에 맞았고 화살은 다 되니 적 화살에 맞아 죽었다. 적병이 목책 안으로 쳐들어오니 중등 포수는 총 한번 쏘지 못하고 무너졌다. 허완은 세 번이나 부축하여 말에 태웠으나 번번이 떨어져 밟혀 죽었다. 쓰러진 시체가 목책과 가지런히 쌓여 있으니 적병이 짧은 무기로 함부로 찍었다.

민영 진영 또한 급히 서두르다가 화승(火繩)이 화약더미에 떨어졌다. 화약이 폭발했다. 적이 이때를 틈타 총돌격하니 전군이 전멸되고 민영도 죽었다. 적이 죽은 자 옷을 벗기고 불을 놓아 태우고 갔다. 마침내 적 300여 기병에게 좌우 양진이 격파되었다.' 실록은 '허완은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패하여 죽었으며 민영은 힘껏 싸우다 역시 패하여 죽었다'고 기록했다.(1637년 1월 15일 인조실록) 수습한 시신은 100분의 1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는 길에 버려져서 까마귀나 개가 제멋대로 뜯어 먹어 백골이 마구 흩어져 있었다.(1637년 4월 7일 승정원일기)

4만 대군이 큰 고개 아래 진을 쳤다가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적군 300명에게 몰살당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400년 정신 못 차린 문약(文弱)

이보다 44년 전 임진왜란 초기 선조를 알현한 명나라 병부 관리 유황상이 선조에게 이리 말했다.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었지만(貴國自高句麗 號稱强國) 선비와 서민이 농사와 독서에만 치중한 탓으로 변란을 초래한 것이다(唯事耕田讀書 馴致此變)."(1593년 6월 5일 선조실록) 유황상 보직은 병부 원외(員外)다. 정원외 하급 관리에게 조롱을 당할 만큼 조선은 약했다.

문약과 오만에 빠진 조선 정부가 숨어 들어간 남한산성 지화문.이미지 크게보기
문약과 오만에 빠진 조선 정부가 숨어 들어간 남한산성 지화문.
이보다 300년 전 고려 때도 똑같은 대화가 기록돼 있다. 1291년 2월 19일 합단(哈丹)이 고려 북쪽을 침범했다. 고려가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자 몽골 황제 쿠빌라이가 반문했다. "당 태종도 이기지 못했던(唐太宗親征尙不克) 너희다. 우리가 정벌할 때도 쉽게 이기지 못했다. 그런데 이 조그만 도둑을 그렇게 심히 두려워하느냐?" 고려 사신 오인영은 "나라 성쇠함이 옛날과 같지 않다(古今盛衰 不同爾)"고 답했다.(1291년 고려사 세가 충렬왕 17년 2월) 지휘도 미숙했다. 훈련도 미비했다. 근본 문제는 문약(文弱)한 시스템이었다. 그 시스템이 옳다고 끝까지 자만했던 최고 지휘부가 문제였다.

"향교는 병역 기피의 소굴"

조선 병역은 원래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였다. 16세부터 환갑까지 상놈이든 사대부든 남자는 해마다 일정 기간 병역을 치러야 했다. 인생의 44년이 병역 의무 기간이다. 정도전이 만든 시스템이다. 그런데 개국 후 200년 가까이 전쟁이 없다보니 군역을 옷감이나 곡식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늘었다. 남을 사서 대신 군에 보내는 대립군(代立軍)이 성행했다.

사대부 또한 병역 의무가 있었으나, 공부하는 사대부 유생(儒生)은 군 입대가 면제되거나 연기됐다. 관원이 된 사람도 병역이 면제됐다.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다는 율곡 이이 또한 군에 가지 않았다. 이이는 13세에 장원급제하고 50세에 죽었다.

유생은 성균관이나 지방 향교(鄕校)에 등록된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데.

"지금 유생들은 다 군역(軍役)을 피하는 자들입니다(今之校生 皆避軍役者也). 사족 자제는 명칭은 유업(儒業)을 한다고 하면서도 향교에는 다니지 않습니다(名爲業儒 而不赴鄕校)."(1536년 1월 11일 중종실록) 군 입대를 회피하기 위해 향교에 위장 등록을 하는 자들이 많다는 논의다. 56년 뒤 임진왜란이 터졌다.

1626년 인조에게 사헌부가 이런 요구를 한다. "향교에 등록된 자들이 거의 사족이니, 이들을 군에 보내면 사지에 나아가는 것과 다름없게 여길 것입니다(則其視充保 無異於就死地). 과거에 떨어진 자 중 사족이 분명한 자는 군보로 충정하지 말고 별도로 명목을 만들어 인심을 위로하게 하소서."(1626년 8월 10일 인조실록) 과거 재수생도 군대를 면제시켜 달라는 요구였다. 인조는 자기를 왕으로 만들어준 공신들 요구를 들어주었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터졌다. 또 9년 뒤 병자호란이 터졌다. 결과는 우리 모두 잘 안다.

쌍령 전투의 죽음, 국가의 부음

지휘관들은 노병들이었다. 실제 지휘는 문관 도경유가 했다. 근왕병으로 차출된 사람들은 양인들이었다. 농사를 짓다가 급하게 동원된 사람들이었다. 속오군(束伍軍)이라 한다. 양인(良人)은 노비를 제외한 모든 이를 뜻한다. 공부하는 유생들은 빠졌다. 오히려 주인 따라 참전한 노비들이 많았다. 무기도 제대로 못 챙기고 엄동설한에 홑옷 입고 달려온, 오합지졸이었다. 대부분 퇴역 군관이나 나이와 상관없이 무보직 무과 합격자들이 모집해 급조한 의병이나 속오병들이었다.(박광운, '병자호란과 쌍령 전투')

군대에 가면 선비들은 사지에 몰린다는 사람들이, 오합지졸은 전쟁에 내보내 백골로 흩어버리는 사람들이 나라를 경영했다. 그 꼬라지를 차량 붐비는 3번 국도 쌍령리 정충묘에서 보았다.


조선일보 A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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