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VIEW] 6·12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美北

김진명 기자
입력 2018.08.30 03:01 수정 2018.08.30 08:33

북한은 先비핵화 조치 거부, 미국은 "한미 연합훈련 재개"
'비핵화 할 건가, 대결할 건가' 트럼프, 김정은에 공개 압박

한반도 정세가 6·12 미·북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형국이다. 북한이 핵 리스트 신고나 핵·미사일 반출 등 근본적 비핵화 조치를 먼저 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미·북 대화는 잠정 중단 상태에 빠졌다. 미국은 한·미 연합 군사훈련 재개와 제재를 거론하며 대대적 대북 압박 쪽으로 태세를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런 정세 변화에 우리 정부도 이달 중으로 예정했던 개성공단 내 남북 공동 연락사무소 개소를 연기했다. 청와대는 "촉진자·중재자로서의 역할이 더 커졌다"고 했지만, 미국이 비핵화 보조를 맞추라고 요구하고 있어 다음 달 평양에서 열기로 한 남북 정상회담의 실행을 두고도 정부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한반도 정세가 싱가포르 회담 이전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대표적 신호는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의 '한·미 연합 군사훈련 재개' 발언이다. 매티스 장관은 28일(현지 시각) "더 이상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중단할 계획이 없다"며 "훈련은 계속된다"고 말했다. 한·미 훈련 중단은 싱가포르 회담의 가장 직접적 결과물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회담한 당일 싱가포르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는 워 게임을 중단할 것"이란 말로 한·미 훈련 중지를 전격 발표했었다. 당시 미 국무부는 "선의(善意)를 보이는 차원에서 미국은 생산적인 대화가 지속되는 한 한국과의 워 게임을 중단하기로 한 것"이라고 그 배경을 설명했었다.

그랬던 미국이 '훈련 재개'를 거론하고 나온 것이다. 이는 북한에 "더 이상 비핵화에 미적대지 말고 협상장으로 나오라"는 독려의 메시지인 동시에, 그럼에도 북이 지금까지의 태도를 고수할 경우 "미·북 관계는 6·12 이전으로 되돌아간다"는 경고로 볼 수 있다.

제임스 매티스(왼쪽) 미 국방장관과 조셉 던퍼드 합참의장이 28일(현지 시각) 버지니아 알링턴 소재 펜타곤(미 국방부)에서 합동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매티스 장관은 6·12 미·북 정상회담 이후 중단된 한·미 훈련과 관련해 “더 이상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중단할 계획이 없다. 훈련은 계속된다”고 말했다. /EPA 연합뉴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28일 발표한 성명에서 "평양행을 연기한 결정에도 불구하고, 김정은 위원장이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했던 '북한을 완전히 비핵화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이 분명해질 때 미국은 다시 대화(engage)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헤더 나워트 국무부 대변인도 "언젠가는 폼페이오 장관이 다시 북한에 갈 것인가"란 질문에 "북한이 대화할 준비가 되고 그것이 생산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때"라고 답했다. 현재 북한이 비핵화 약속을 지키면서 생산적 대화를 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의미다.

미·북 대화 진행을 동력으로 삼아 4·27 판문점 선언에 포함된 각종 남북 관계 사업을 추진하려던 우리 정부 계획에도 제동이 걸렸다. 당장 다음 달 평양에서 열 예정이었던 남북 정상회담의 일정·의제를 논의하는 것부터 문제다.

우리 정부는 8월 말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이 순조롭게 이뤄지면 이를 '비핵화 진전'으로 보아 개성공단 내 남북 공동 연락사무소를 개소할 예정이었다. 또 9월 중순 남북 정상회담에서 판문점 선언에 포함된 도로·철도 연결을 비롯한 각종 교류·협력 사업을 대폭 확대 추진하려는 구상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 내 기류 변화로 연락사무소 개소마저 불투명해진 상황이며 북한이 만족할 만한 교류 사업 이행도 난관에 부딪혔다.

그렇다고 북한의 요구대로 판문점 선언 이행과 교류·협력 사업에 속도를 내면 한·미 관계가 크게 틀어질 수 있다.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 취소 전부터 미국 정부는 우리 측에 '남북 관계도 비핵화 진전에 보조를 맞춰줄 것'을 끊임없이 요구해 왔다. 반대로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을 만나서 비핵화를 압박하면 북한이 반발할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미·북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며 남북 정상회담을 열어봤자 '빈손 회담'이 될 것이란 우려로 일각에서는 '연기론'이 제기되고 있다.

이 밖에도 북한 정권 수립일(9월 9일)을 계기로 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 유엔 총회(9월 하순)를 전후로 한 김정은의 방미와 미·북 2차 정상회담 등 9월 중 성사 가능성이 거론돼 온 대형 외교 이벤트들도 줄줄이 영향을 받게 됐다.

미국은 대북 압박 수위 높여

북한의 진정성을 의심하기 시작한 미국은 대북 압박의 수위를 더욱 높이기 시작했다. 28일 하루 동안 매티스 국방장관,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 대사가 돌아가면서 북한의 '선(先) 비핵화 조치'를 압박하는 메시지를 냈다. 매티스 장관은 "더 이상 한·미 훈련 중단 계획이 없다"고 밝히면서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긴밀히 협의하며 그의 노력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일들을 할 것"이라고 했다. 한·미 훈련 재개 결정이 미국 정부 내에서 공감대를 갖고 이뤄진 일이란 점을 분명히 한 셈이다. 매티스 장관은 또 "앞으로 협상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지켜보면서 미래를 계산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비핵화 협상에 협조하지 않으면, 미국의 군사적 대비 태세도 그에 따라 강화될 것이란 점을 예고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모든 회원국은 북한이 모든 핵무기,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과 다른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데 투표했었다"고 밝혔다. 미국의 비핵화 요구에 대해 '선(先) 종전 선언, 평화 협정'을 주장해 온 북한에 대한 메시지였다. 북한의 비핵화는 종전 선언이나 평화 협정 등과 맞교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에 명시된 국제적 의무란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김 위원장이 동의했던 북한의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 목표는 세계의 목표다. 미국은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북한이 (유엔 안보리) 결의들을 따라 김 위원장이 자국민에게 더 밝은 미래를 제공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고 했다. 나워트 국무부 대변인도 "다른 정부나 개인들이 '미국이 협상판을 뒤엎고 있다'고 비판한다면 만장일치로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안들을 다시 상기시켜 줄 것"이라며 "유엔 안보리 결의에는 북한이 비핵화를 해야 한다는 세계 모두의 기대가 표현돼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비핵화 요구 때문에 미·북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니며, 북한이 할 일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헤일리 대사는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생각을 바꾸거나 그러고 싶어 하는 것일까? 가능한 얘기다"라고 했다. 이어 그는 "우리는 제재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비핵화나 그것이 세계에 대한 위협이 된다는 시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선 비핵화 조치 없이 제재 해제는 없다는 경고로 볼 수 있다.


조선일보 A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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