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투자 쇼'에 동원된 기업

이성훈 산업1부 차장
입력 2018.08.02 03:12
이성훈 산업1부 차장
며칠 전 5대 그룹의 한 임원은 낯선 번호의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상대방은 자신을 삼성그룹 임원이라고 밝혔다. 그가 전화를 건 이유는 '외빈 접대' 때문이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회사로 온다며 "의전은 어떻게 해야 하나, 기획재정부와 별도 자료를 만들어야 하나, 사업 통계는 어떻게 만드는가"라며 꼬치꼬치 물었다. 올해 초 김 부총리는 이 그룹을 찾아갔었다.

김동연 부총리는 지난 26일 삼성 방문 계획을 밝히며 "(기업의) 얘기를 듣고 대화를 나누려면 겸손한 자세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하지만 기업들은 바짝 긴장하고 부산을 떤다. 한 재계 관계자는 그 이유에 대해 "한 번 찍히면 총수 일가 앞으로 다섯 번 구속영장이 날아오고 사업 면허가 취소될 수 있다는 걸 보지 않았나"고 했다. 요즘 재계에선 "경제부총리가 일수 도장 받으러 오는 사람 같다"는 말까지 나돈다.

삼성그룹 안팎에선 이번에 삼성이 100조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내놓을 것이란 예상이 유력하다. 정작 이렇게 예상하는 근거가 허탈하다. 김 부총리 방문에 맞춰 작년 12월 LG그룹은 19조원, 올 1월 현대차는 23조원, 3월 SK는 80조원 투자 계획을 밝혔으니 재계 1위 기업인 삼성이 정부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면 100조원은 돼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유에서다.

글로벌 기업 삼성의 투자 전략이 이런 논리와 방식으로 최종 결정된다면 참 후진적이고 허망한 일이다. 그러나 팔 비틀린 기업들은 정부가 준비한 '투자 쇼' 무대에 매번 이런 식으로 동원돼 온 게 한국의 엄연한 현실이다.

기업들이 수십조원 투자, 수만명 채용 계획을 발표할 때면 취업 준비생은 기대감에 부푼다. 취업문이 확 넓어질 것 같다. 그러나 현실에선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기업이 발표하는 투자·채용은 이미 갖고 있던 계획에 추가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SK하이닉스는 최근 경기 이천에 15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생산 라인 M16을 짓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 계획은 최태원 회장이 2015년에 이미 밝힌 것이다. 이번에 인허가가 완료돼 좀 더 확정적으로 발표했을 뿐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정부 요구를 그대로 따랐다가는 살아남는 회사가 없을 것"이라며 "기업들의 고육책"이라고 했다.

한 경제 연구소 박사는 "지금까지 대기업이 밝힌 투자·채용 계획을 모두 합하면 우리나라에 실업자는 한 명도 없어야 정상"이라고 했다. 정부의 '쇼'로는 투자나 일자리를 늘릴 수 없다. 기업이 자발적으로 투자하고 고용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규제를 푸는 게 최고의 명약(名藥)이다. 김 부총리는 기업 방문만 말고 기업이 춤출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 실천하길 바란다.


조선일보 A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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