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칼럼] 이제 한국서 갑질범은 '인민재판' 대상

입력 2018.07.12 03:17

갑질범은 적폐범과 함께 표적 수사가 허용되는 법치의 예외 지대
군중 앞 불려 나온 갑질범, 법 아닌 폭력으로 쳐도 박수 치는 한국 사회

양상훈 주필

대한항공 회장 아내와 자녀들을 보며 '분노 조절 장애'라는 것이 어떤 병인지 실감한다. 둘째 딸이 광고 회사와 회의하는 시간에 물컵을 던지고 음료수를 뿌리는 현장으로 추정되는 녹음은 괴성의 연속이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외마디 고함을 지르는데 보통 사람들이 화가 났을 때 보이는 반응을 훨씬 넘어서 있다. 애초에 큰 회사에서 중책을 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회장 딸이 아니었으면 아무리 분노 조절 장애를 안고 있다고 해도 회의 석상에서 물컵을 던지고 괴성을 지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회장 아내의 손찌검도 갑질이고 큰딸의 땅콩 소동도 갑질이다. 근래 한국 사회에선 범법 행위보다 갑질이 더 규탄받는 혐오 대상이다. 범법 행위는 피해자가 소수로 특정되지만 갑질은 거의 전 국민에게 정서적 피해를 줘 훨씬 광범위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경우처럼 재벌 가족 전체 갑질일 때는 그 반감은 몇 배로 커진다.

광범위한 반감은 갑질에 대한 보복을 정당한 것으로 느끼게 한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모두가 요구하는 보복은 '정의'로 쉽게 규정될 수 있다. 문제는 '정의로운' 반감과 보복 욕구를 법이 풀어주지 못하는 데 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처벌을 원하는데 그에 해당하는 법 규정이 없다. 현대 문명국의 형법에는 사람들이 없는 방향으로 물컵을 던지고 괴성을 질렀다고 형사처벌하는 조항이 없다. 경찰은 작은딸에 대해 '특수 폭행' '업무 방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형법 제261조(특수 폭행)는 '위험한 물건을 휴대하여 사람의 신체에 대하여 폭행을 가한 자'라고 처벌 대상을 명시하고 있다. 작은딸의 행위로 물컵을 맞은 사람이 없다. 광고주가 자기 광고의 업무를 방해한다는 것도 논리적이지 않다. 구속영장이 기각될 수밖에 없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선 갑질이 발생해 공분이 일어나면 정부 권력이 이에 가세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다수가 정의롭다고 느끼는 처벌 욕구에 공권력이 결합하면 '답답하고 고식적인' 법 규정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가능해진다. 법 규정을 무리하게 적용한 경찰의 구속영장 청구는 한 예에 불과하다. 행위가 아니라 사람과 가족을 겨냥한 일제 조사도 이른바 정의로운 표적 수사가 된다. 표적 수사는 법치 사회에서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한국 사회에선 적폐범과 함께 갑질범도 표적 수사가 허용되는 법치의 예외가 된다.

물컵을 던진 작은딸만이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와 언니, 남동생 등 일가족 전원에 대한 일제 조사에 경찰, 검찰, 출입국 당국, 관세청, 교육부, 공정위, 국토부, 복지부 등이 나서 압수 수색을 11차례 하고 구속영장을 4차례 청구했다. 수사나 조사권을 가진 정부 기관이 총동원됐다고 한다.

그런데 구속영장이 모두 기각됐다. 구속의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 가족이 앞으로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즉각적 처벌과 구속을 원하는 대중의 정서는 카타르시스를 얻지 못했다. 대중적 카타르시스를 위해 고심하는 공권력은 앞으로는 판사가 아닌 자신들 권한으로 처벌할 수 있는 길을 찾을 것이다. 아들의 20년 전 인하대 편입학을 취소시켜 그를 고졸로 만든 것은 그 한 예다.

법은 대중(大衆)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때가 있다. 법률과 법 절차 자체가 대중의 감정적 '정의 구현'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법과 대중 욕구의 불일치 때문에 등장한 것이 인민재판이다. 기원은 로마 시대까지 올라간다. 근세에는 공산주의 국가들이 '여론을 재판에 반영하는 인민 자치(自治)'라면서 인민재판을 하고 있다. 지금 대한항공 회장 가족에 대한 일제 조사는 공산주의식 인민재판은 아니다. 그러나 공권력이 갑질에 대한 대중의 반감에 부응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행사되고 있으며 법 규정은 단지 그 수단으로, 그것도 자의적으로 무리하게 이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인민재판적 성격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이 과정에 언론의 여론몰이가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성난 군중 앞에 범인이 불려나온 광경이다.

갑질범에 대한 인민재판은 박찬주 전 육군 대장부터 시작됐다. 공관병에게 갑질을 했다고 국민적 공분을 산 그는 갑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700만원 밥·술 접대 혐의로 구속됐다. 하지만 대중은 박 전 대장이 갑질로 처벌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 처벌 이유는 갑질인데, 여기에 동원된 법은 전혀 다른 것이라면 이는 죄형법정주의라는 법치 사회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죄형법정주의 정신을 벗어난 인신 처벌은 인민재판의 전형적 특징이다. 여당 갑질범은 '우리 편'이어서 대충 넘어가는 것도 인민재판의 자의적 속성이다. 대중의 반감을 업고 과도하게 행사되는 공권력은 법 아닌 폭력이다. 갑질 폭력에 정부 폭력으로 대응하고 그게 박수 받는 게 지금 우리 사회 모습이다.



조선일보 A34면
조선일보 구독이벤트

오늘의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