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칼럼] 대한민국 농락 리얼리티 쇼

입력 2018.06.13 03:18

그럴듯한 합의문 내놓고 뒤로 속일 것이라 봤는데 미·북 내놓고 맹탕 합의
유난히 쇼 많았던 지난 1년, 싱가포르 '역사적' 쇼까지… 불 꺼진 뒤 관객은 뭐가 되나

양상훈 주필
어떤 회담 결과가 이렇게 궁금한 적도 드물었다. 상식적 추론으로는 김정은은 핵을 포기할 수가 없는데 포기한다고 하니 그런 기적이 정말 일어날 것인지 궁금했다. 김정은이 트럼프를 속이려는 것이라면 그 사기 문서는 어떤 내용일지도 궁금했다. 필자는 미·북이 그럴듯한 북핵 폐기 합의문을 발표하고 북은 핵물질을 수많은 땅굴에 숨겨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진실이 드러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고 진실이 드러난 뒤엔 북핵 보유가 기정사실화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런데 막상 회담이 끝난 결과 합의문 자체가 완벽한 맹탕이다. '기적은 역시 없었다'는 정도가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농락을 당한 것 같다.

트럼프·김정은 회담을 보고 아무래도 북한 핵 보유를 막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우선 김정은은 임기가 없고 한국과 미국 대통령은 5년, 4년짜리 시한부 권력자일 뿐이다. 김정은은 선거가 없고 한·미 대통령은 선거에 목을 걸어야 한다. 김정은은 긴 안목으로 일관된 정책을 밀고 나갈 수 있지만 한·미 대통령은 1년, 2년 앞의 선거 때 내세울 무언가를 위해 근시안적 성과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민주정치 체제에서 이에 초연한 정치인, 정당은 있을 수 없다. 핵 문제와 같이 20년 이상 가는 사안을 놓고 김정은과 협상을 벌인다면 한·미는 구조적, 근본적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다.

1994년 제네바 합의는 미국 중간선거 한 달 전이었고, 2000년 백악관 미·북 코뮈니케는 미 대선 한 달 전이었다. 2005년 9·19 성명은 미국 중간선거 1년 전이었고, 2007년 2·13 합의도 미 대선 1년여 전이었다. 미·북 간의 핵 협상을 현장에서 지켜본 전직 외교관은 "미국에 선거가 다가오면 미국 측 협상 대표의 눈이 떨리는 게 보인다"고 했다. 이를 잘 아는 북측 대표는 '배 째라'고 나오고 결국 합의문이 북측에 유리한 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11월에 중간선거, 2년 뒤에 본인 재선이 걸린 대선이 있다. 11월 중간선거는 본인 탄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미·북 회담을 보고 있는지는 자명하다. 트럼프는 선거에 도움이 될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되면 어떤 합의문에라도 서명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이 속일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하겠지만 끝까지 입 밖에 꺼내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북핵 폐기가 될 것처럼 얘기할 것이다. 뿌리가 '햇볕'인 본인과 민주당의 정치적 입장에서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열린 어느 회의에서 문정인 특보는 북한이 비핵화할 가능성이 "90%"라고 했다. 그 회의에서 중국 전문가는 "20%"라고 했다. 한국 안보특보가 '20%'라고 신중하게 전망하고 중국 전문가가 '90%'라고 희망적으로 예측하는 것이 맞겠지만 지금은 거꾸로 돼 있다. 이 구조도 김정은의 핵 보유 전략에 유리한 바탕이 된다.

북핵을 막지 못하는 것, 타고 다닐 비행기 한 대 없는 빈곤 집단의 우두머리가 미국 대통령과 대등한 듯 쇼를 할 수 있는 것, 한국민의 생사가 걸린 회담장에 태극기가 없는 것 모두는 결국 한국민에게 '결기'가 없기 때문이다. 1990년대 북핵 개발 초기에 미국이 폭격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 우리 국민이 결기 있게 나섰다면 전쟁 없이 북핵 문제는 끝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런 결기는 불가능하다. 트럼프·김정은 회담은 본질적으로는 5100만명을 인질로 잡고 있는 김정은과 세계 경찰관 미국의 인질 협상이다. 인질범이 원하는 것을 얻고 성공하더라도 총격전 없이 사태가 끝나기를 바라는 것이 인질의 심리다. 바로 이것이 김정은이 가장 믿는 구석이다.

구조적으로 북핵을 막기 어려운 것이 현실인데 그래도 '혹시' 하는 희망을 가졌던 것은 트럼프라는 사람 때문이었다. 워낙 좌충우돌, 예측 불허여서 김정은이 마침내 '임자를 만났다'는 생각도 했다. 전방위 대북 제재로 숨통을 조이고 마치 바로 때릴 듯이 북한을 압박하니 김정은이 손을 들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도 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한 편의 리얼리티 쇼였던 모양이다. '미국'과 '미국인' '백인' '돈'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동맹'과 '안보', '핵 비확산', 'CVID' 등은 쇼 흥행보다 중요할 수 없었다.

최근 1년 사이 우리는 나라 안팎에서 유난히 많은 쇼를 보고 있다. 연출 기술도 뛰어나 사람들 눈을 홀리는 쇼가 연이어 벌어지더니 싱가포르의 '역사적' 쇼까지 왔다.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화려한 무대가 끝나고 조명이 꺼지면 관객만 남는다.


조선일보 A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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