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김정은과 '싱가포르 모델'

이진석 논설위원
입력 2018.06.13 03:17
2009년 예산안에 '대북지식협력사업'이라는 묘한 항목이 있었다. 2억2500만원이 배정됐다. 그해 가을 중국 다롄의 한 대학교에 개설된 시장경제 특별 강의를 지원하는 사업이었다. 수강생들이 더 특별했다. 북한 경제 관료와 교수, 기업인 등 48명이 12명씩 네 차례에 걸쳐 각각 2주간 수업을 들었다. 국가계획위원회, 무역성 경제정보국, 외무성 경제국, 식료일용공업성의 국·과장급 관료와 화성회사 등 기업인들이 포함됐다. 당시 정부 관계자는 "북한 관료들은 한국 측이 지원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참가했다. 경제개발을 위해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김정은이 미·북 정상회담 전날 밤 싱가포르 마리나베이샌즈호텔 전망대에서 야경을 둘러보고 "싱가포르의 훌륭한 지식과 경험들을 많이 배우려고 한다"고 했다. 싱가포르식(式) 발전 모델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싱가포르는 독재국가이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시장경제를 발전시킨 독특한 나라다. 국부(國父) 리콴유가 1965년 초대 총리로 취임해 25년 장기 집권했고, 후계자인 고촉통 총리가 15년, 리콴유의 아들 리셴룽 총리가 2004년부터 15년째 집권 중이다. 3대 세습 북한엔 여러 가지로 매력적으로 비칠 수 있는 나라다. 

▶당초 북한의 경제개발 모델로는 중국식이 거론됐었고, 최근에는 베트남식이 급부상했다. 베트남은 공산당이 직접 외국 기업과 투자자를 선정했다. 각 성(省)들이 각개약진했던 중국보다 더 중앙집권적인 개발 전략을 썼다. 중국 편향 이미지를 벗어나 미국 등의 투자를 받기 위해서는 베트남식이라는 간판이 유리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다. 그러다 이제 또 싱가포르 모델이다.

▶김정은이 무슨 모델을 택하든 "이밥(흰 쌀밥)에 고깃국 먹고 기와집에서 살게 해 주겠다"고 했던 김일성의 약속을 지키려면 핵을 버려야 한다. 싱가포르는 독재를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개방된 경제 국가이기도 하다. 개방 정도를 점수로 매기면 싱가포르가 100점, 북한은 0점이다. 북이 핵을 안고 버틸 수는 있어도 개방까지 할 수 있을까.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는 '북은 개성식 단절 모델로 간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WTO 등에 가입하고 세계은행이나 국제기구의 지원을 받으려고 하겠지만, 중국이나 베트남과 달리 외부 정보 차단, 주민 이동 금지 같은 것들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개성공단' 방식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 말이 맞을 것 같다.


조선일보 A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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